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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 물린 밤의 상상

김향남(수필가·문학박사)

2021년 07월 21일(수) 10:04
또 잠을 깼다. 까무룩 꿈속에 들었나 싶은데 그 틈에 또 한 방을 물리고 말았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거푸 나를 노리는 게 괘씸하기 짝이 없다. 얇디얇은 이불마저 발밑으로 내쳐져서 내 몸은 거의 맨사댕이 상태지만, 설마 모기에게 헌사하고 싶었겠나? 일어나 불을 켜니 앵앵대던 소리는 간 데도 없고 부풀어 오른 살갗만 벌거니 가렵다. 침까지 발라가며 물린 곳을 얼러 봐도 가렵기만 더할 뿐 소용도 없다. 다시 잠을 청해본다. 아니다. 이번엔 나도 기를 쓰고 기다린다. 단박에 때려잡을 기세로 주먹을 움켜쥔다.

하지만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누구는 세상모르고 꿀잠을 자도 털끝 하나 건들지 않으면서 왜 하필 나한테는 저리 못되게 구는지. 집요하고 엉큼하기가 말로는 할 수 없다. 잔뜩 별러서 잽싸게 어퍼컷을 날려보지만 용케도 피해버린다. 그 민첩함은 또 어디서 배운 것인지…. 갈수록 약이 올라 잠도 다 깨버렸다.

옛날에 한 미인이 있었다. 이름은 수로(水路), 신라 성덕왕 때 강릉 태수 순정공의 아내다. 그녀의 미모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서시니 양귀비니 하는 세기의 미인들도 수로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경국지색이라 일컬어지는 그녀들의 미모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을 만큼, 기러기가 날갯짓을 잊고 땅으로 떨어질 만큼 혹은 달도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고 꽃마저도 잎을 말아 올릴 만큼 뛰어난 미모를 지녔다고 하지만 수로만큼은 아니었던 것이다.

수로가 얼마나 예뻤냐 하면 인간 세상의 남정네들은 물론이고 큰 산이나 깊은 바다, 거기 사는 신물(神物)들까지도 마음을 빼앗겨 앞뒤 잴 것도 없이 오직 그녀를 탐할 정도였다. 소를 몰고 가던 한 노옹은 사람이 오를 수 없는 험준한 벼랑 끝의 꽃을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바치고자 하였고, 동해의 해룡은 바닷속 깊은 곳으로 아예 납치를 해버릴 정도였다. 아내(수로)를 빼앗긴 그 남편(순정공)과 또 어쨌던가. 백성들과 더불어 몽둥이를 두드리며,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남의 아내 빼앗은 죄 얼마나 크냐/네 만약 거역하고 내놓지 않으면/그물로 너를 잡아 구워 먹겠다.” 애원도 했다가 으름장도 놓았다가 큰소리로 외치니 그 함성 과연 무쇠도 녹일 지경이었다.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칠보궁전에 진귀한 음식과 색다른 향기로써 수로를 꾀어 보려던 해룡도, 바닷속 깊이까지 쩌렁쩌렁 울려대는 그들의 원성을 차마 거역할 수 없었다. 마지못해 수로를 내놓고 황망히 돌아설 수밖에….

하릴없이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엊그제 다녀온 헌화로(수로부인의 이야기가 담긴 강릉의 바닷길) 때문인지, 낮에 읽은 문장들에 기인한 것인지는 몰라도 왠지 저 모기가 곧 노옹이고 해룡인 것만 같다. 모기가 노린 것은 한 방울의 피, 제 생명을 얻기 위한 필사의 춤사위였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나를 노린 데는 아마도 필시 다른 이유가 있을 터.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리도 포기를 모르겠는가. 왜 끝까지 나만 공략하는가 말이다. 아, 어쩌다가 나는 저 미물의 눈에 들게 된 걸까?

하하, 어쩌면 나도 ‘수로’가 아닐까? 아니면 ‘수로’만 한 미인? 그럴 수도 있겠다. 아닌 게 아니라 나도 진짜 ‘수로’였던 적이 있었지 싶다. 어쩌면 그보다 더한 미인이었을 수도 있었겠다. 넓둥글한 얼굴도, 오척단신 짧은 다리도 적어도 한순간엔 천하일색 미인으로 보였던 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삼 년도 못 가 눈에 씐 콩깍지가 벗겨져 버리고 말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대체 무슨 수로 ‘사랑’이라는 것을 했겠는가 말이다. ‘에로스’를 향한 자연 발생적인 환상? 혹은 누군가를 향한 애틋한 열망이 아니었다면 나의 역사는 캄캄했을 것이다. 비단 나뿐이었겠나? 인류의 역사 또한 생명력을 잃고서 시르죽은 풀처럼 말라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수로’가 되고, 누구나 한 번쯤은 ‘노옹’이 되고 ‘해룡’이 되었으므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열대야까지 기승을 부려 눅지근한 밤. 수로와 노옹과 해룡 그리고 나와 모기를 생각한다. 어디로 숨었는지 기척도 없지만, 티끌만 한 모기 한 마리와 더불어 날이 새고 있다. 하기야 내 피로 인하여 저들의 역사는 면면히 이어질 터이니 이 밤의 헌사가 결코 헛된 것은 아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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