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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기적

정태헌(수필가)

2021년 06월 29일(화) 23:50
귓바퀴 안으로 윙~ 하는 소리 흐른다. 눈언저리에 빛이 고인다. 머리끝에서부터 흐르기 시작한 의식의 핏줄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죽음 같은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 손가락을 까딱대 본다. 육신의 실체가 느껴진다. 들숨을 몰아들이니 등판이 움직인다. 눈살에 희붐한 빛이 스며든다.

방안 주변을 헤아려 본다. 머리맡엔 읽다 접어둔 원로 시집이 놓여 있을 테고, 왼편 장롱 안엔 어제 입었던 옷들이 허물처럼 걸려 있겠지. 거실 벽엔 밤새도록 달렸을 시계가 걸려 있을 거고, 자작나무 사이로 굽이진 길이 난 수채화 한 장 걸려 있을 테다.

가만, 무슨 소리인가. 촉수를 모으니 귓바퀴에 소리가 희미하게 잡힌다. 엘리베이터의 금속성 신호음, 어둠을 털고 아침을 깨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다. 현관 앞에 한 걸음이 멈춘다. 누굴까. 툭, 문 밑으로 무언가 떨어진다. 잉크 냄새가 코끝에 스친다. 모자를 눌러 쓴 앳된 그 녀석이겠다. 오늘 신문엔 또 어떤 일들이 형형색색 무늬를 만들고 있는 걸까. 툭, 이번엔 제법 둔탁한 소리. 저건 보관 주머니에 우유팩이 떨어지는 소리다. 배달하는 여윈 눈매의 그 아낙, 아프다는 남편은 차도가 있는 걸까.

의식이 앞 베란다 쪽으로 쏠린다. 빨래걸이엔 세탁한 옷가지들이 널려 있겠다. 그 밑에 놓인 화초들도 눈을 비비고 있겠지. 어제 저물 무렵, 화초들에 물을 주지 않았던가. 그들은 밤새내 목을 축였을까. 분꽃과 나팔꽃은 꽃잎을 열기 위해 준비하고 있겠지. 귀 기울이니 꿈틀거리는 소리가 밀려온다. 발장난을 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기지개를 켜는 걸까.

차츰 의식의 가장자리에 파문이 인다. 미세한 소리가 갈수록 또렷해진다. 덜컹거리며 창문도 깨어나고 있다. 밖엔 바람이 부는 모양이다. 뒷산 솔숲에서 머물던 바람이 내려와 무거운 어둠을 걷어내고 있는 모양이다. 온갖 물상들을 깨우는 저 바람은 간밤 어느 골짝에서 서성대다 내려왔을까. 곧 아침이 열리고 물상들이 돋아 오르리라.

창 너머, 벚나무에 앉아 재재거리던 참새들도 눈을 떴겠고, 화단을 맴돌던 암갈색 고양이 녀석도 지금쯤 깨어났겠다. 이즘 배가 더 불룩해졌던데 언제쯤 몸을 풀려는 걸까. 밤이 지나고 정녕 아침이 깨어나고 있구나.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앞뜰 화단에서 온갖 꽃들이 깨어나는 신호다. 여름이 익어가는 소리다. 오늘도 능소화는 고개를 뽑고 아침부터 누군가를 기다리겠다. 꽃들도 어둠을 털고 깨어나고 있구나. 눈을 뜨고 일어나야지. 어깨를 툭툭 쳐서 새날을 맞아야지.

이쯤 눈을 떠볼까. 아니지, 좀 더 다시 살아났음을 만끽해야지. 간밤, 눈을 감기 전엔 살아있음이었는데 잠 속으로 빠져들면서 세상을 향했던 의식들을 모두 거둬들여 어둠의 선반 위에 놓아두지 않았던가. 가사 상태, 그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면 영영 그곳에 머물렀겠지. 빛과 소리, 느낌과 상상은 끊어지고 말았겠지. 그게 죽음이지 뭔가. 하나 아침을 맞아 의식이 되돌아오고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다시 살아났음이 아니랴. 작은 기적, 스스로 축복을 내리자.

허구한 날, 아침마다 습관처럼 눈을 뜬 거지. 지겨운 하루가 다시 시작된다고 투덜대기도 했었지. 그렇게 아침엔 무겁게 일어났던 터, 하지만 오늘은 새뜻하고 상쾌하게 눈을 떠볼까. 삶은 단조로운 반복과 일상의 지루함이 아닌, 빛나는 환희요 기쁨이라는 것을 느껴봐야지. 그래, 눈을 떠야지. 죽음 같은 깊은 계곡에서 벗어나 또 다른 날을 맞이하고 시작하는 거야. 어제는 낡은 것, 오늘을 새롭게 출발해야지. 새롭지 않고서는 또 다른 시작을 하지 못할 테니까.

아주 천천히 눈을 뜨자. 아침은 황금을 몰고 오는, 하루 중 가장 달콤한 시간이며 찬란한 경이다. 수탉의 장쾌한 울음소리가 없어도 괜찮다. 눈을 뜬다. 아 투명하고 푸른 아침이다. 깊은 잠에서 다시 깨어나는 일은, 다시 눈을 떠 살아난다는 것은 한량없는 기쁨이고 떨림이다. 오늘은 또 다른 평화의 해가 동녘 하늘에서 솟아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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