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면히 흐르는 충정과 문화유산 향기 오롯이

▲박재완? 발걸음 경계에서-슬로시티 창평 돌담길

세 개의 물줄기 모여 삼지천마을로 불려

등록문화재 265호인 담장길은 약 3,600m

임란 의병장 고경명 후손들 자리잡은 곳



산봉우리 옹달샘은 작은 실개천을 만들고 또 다른 실개천은 흘러내려 인간에게 삶을 영위하도록 만든다. 그 속에 또 하나의 작은 둥지들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문화유산의 둥지를 만들어준다.

월봉산에서 발원한 월봉천과 운암천, 유천 등 세 개의 물줄기가 마을로 모여 흐른다고 해 삼지천(三支川)이라 불렸던 담양 창평면 삼지천마을. 마을 동쪽에는 월봉산, 서쪽에는 국수봉이 솟아 있다. 마을 앞에는 너른 논이 펼쳐지며, 냇물이 마을을 감싸 흐르는 게 봉황이 날개를 뻗어 감싸 안은 형국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수십 년 전의 마을 개천은 공사로 물줄기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다시 다행히도 이를 복원해 냇물이 흐르고 있다. 마을안길 도로포장을 걷어내고 실개천 482m를 복원했다. 돌담길은 자잘한 자갈과 흙으로 복원해 돌담과 어울리는 길을 만들어 놨다.



◇제대로 갖춰진 양반가모습 전통한옥 구성

창평 월봉산과 국수봉은 호남정맥의 능선이며 무등산과 맥을 같이 한다. 면적 33.803㎢ 에 인구 5,000명이 사는 창평면은 논이 밭보다 4배가 많다. ‘햄버거 없이도 살 수 있다. 백화점, 자동차 없이도 살 수 있다’며 최초의 슬로시티를 선언한 ‘그레베 인 키안티’ 마을 주민의 삶을 표방한 창평 삼지내 마을. 흔히 초가들이 주를 이루고 그중 부자로 보이는 한 두 집의 기와집과 넓은 정원이 전부인 여느 시골 마을과 다르다.

삼지내 마을의 대다수 가옥은 제대로 갖춰진 양반가의 모습으로 전통한옥 구성에 소홀함이 없었고 화강석과 논흙을 사용한 담장들도 그와 어울려 제 역할을 했다. 등록문화재 265호인 담장은 약 3,600m에 달한다. 근 십여 리 길이의 담장은 마을 뒤편 창평 뜨락을 가로지르는 창평천과 마을 앞 월봉천, 운암천, 유천 돌들이 지게 바작에 올려져 마을로 모여든 뒤 장인의 손에 얼기설기 좌우 대칭에 맞춰 모양새를 뽐내며 만들어진다. 오랜 세월의 그 집에 얽힌 수많은 역사와 사연들을 모두 알고 있을 담장들은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옆자리 돌멩이와 자신을 안아준 흙들과 도란거린다. 서로 얼싸안은 채 돌담 틈에 담쟁이에게도 틈새를 내주며 오랜 세월을 부대끼며 함께 작열하던 태양과 온갖 풍상을 견디며 한결같이 집을 지켜낸 뚝심이 찾아간 나그네를 고개 숙이게 한다.



◇고경명, 두 아들과 전사 시호 ‘충렬’

돌담 따라 미로 찾기 하듯이 이 골목 저 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면 타임캡슐을 타고 중세로 돌아간 착각이 든다.

고재선, 고재환, 고정주 가옥 등 이름에서 보듯, 삼지내 마을은 고씨 마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임진왜란 때 문신임에도 분연히 일어선 의병장 고경명의 후손들이 자리 잡은 곳. 고경명 장군은 6,000명의 의병을 담양에서 일으켜 충남 금산에서 왜병과 싸우다 두 아들과 함께 장렬히 전사해 ‘충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 마을에는 그의 ‘세독충정(世篤忠貞)’이라는 호가 현판으로 남아있다.

민속자료 5호로 지정된 고재선 가옥. 금계(錦溪) 고재선이 1915년 지은 튼실한 기와집의 위용은 여전했으나 현재는 빈집으로 남아있다. 사랑채와 살짝 비켜 앉은 안채에선 큰살림 꾸리던 안방마님의 발소리가 들릴 듯하다. 사랑채 사이에 난 작은 문으로 얼마나 많은 사연이 드나들었을까. 그중 인상적인 것은 사랑채 옆의 굴뚝이었다. 기와와 진흙으로 만든 사각형 기둥 모양이 마치 집을 수호하는 수문장인 것만 같았다. 연기를 뿜으며 입술을 오므리고 우뚝 서 있었는데 그 연기는 집 문을 드나드는 사람을 향했다고 한다. 요즘 같으면 방역을 위해 물을 뿌리듯 연기를 쐰 것이다. 이젠 잠든 그를 깨워 다시 일으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모두 생각해 볼 때이다.



◇‘영학숙’세워 신문물 교육제도 실천

또 다른 골목을 돌다 보면 솟을대문이라 부르는 웅장했을 법한, 대문이 있으며, 다른 집보다는 허름한 기와집이 보인다. 이곳은 민속자료 42호로 지정된 춘강(春崗) 고정주(1863~1933) 집이다. 구한말 규장각(奎章閣) 직각(直閣)을 지냈으며, 1905년 을사늑약의 침탈이 시작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다. 그리고 이듬해 어린 시절 공부했던 상월정을 손질해‘영학숙’(英學塾)을 세운다. 영학숙은 외국어 학교다. 그 당시 영어와 수학을 할 줄 아는 선생을 모셔 온 것이다. 획기적인 일로 호남에서는 최초 신문물 교육제도를 도입한다.

상월정에서 자신의 둘째 아들인 고광준과 사위인 인촌 김성수, 그의 동생 김연수, 고하 송진우, 가인 김병로, 백관수, 현준호, 김시중 등이 공부했다 한다. 그리고 점점 학생 수가 늘어나자, 1908년 창흥의숙으로 발전해 초등과는 3년, 고등과는 6개월의 과정으로 학생 수는 50여 명에 이르렀다. 교과 과목은 한문, 국사, 영어, 일어, 산술이었다. 바로 이 학교가 현재 창평초등학교의 모태가 됐다.

창평 뜨락의 넉넉한 집안과 구한말 고위직의 관직에 있어서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 일찍 남다른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대표적 의병장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으로 큰 자부심을 지니며, 선비적 삶의 전형은 무엇인가를 대를 이어 보여준 춘강은 같은 집안에서 같은 시기의 구한말 의병장이었던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과는 비록 노선은 다소 달랐지만, 서로를 인정하면서 녹천이 춘강에게 지원 요청하면 표면상으로는 할 수 없다 답하지만, 녹천이 오면 슬며시 자리를 피해 용인했다 한다.

녹천은 의병장으로, 춘강은 교육운동으로 구국의 일념으로 일생을 살다 갔다.



◇유례 없는 폭우로 곳곳 훼손 허탈

이런 민속자료집들이 몇 년 사이 몰라보게 훼손됐으며, 등록문화 돌담 역시 작년 유례없는 폭우로 곳곳이 무너져 내렸다. 나라를 위해 애써 주신 조상께 뵐 면목이 없어진 것 같다, 관계 당국은 당국대로, 문중은 문중대로 각각 다른 생각과 오해의 골이 깊은 듯 보인다.

삼지천 창평을 찾는 관광객은 낡고, 무너진 주택, 허물어진 돌담, 자물쇠로 굳게 잠긴 고택을 보면서 한 숨을 내쉰다. 잔뜩 찌푸린 겨울 하늘 아래 발걸음을 돌린다.

10여전 전에는 음악회가 열려 사람들로 가득했다.

딱 10년전 고정주 가옥을 찾은 탐방객.

딱 10년전 고정주 가옥을 찾은 탐방객.

창평 돌담 골목길

창평 만세루 낙조.

작ㅈ년 폭우로 무너져 내린 고정주 가옥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