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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원의 현대미술에세이-질문과 대답<21>예술적 각성과 정신적 개화에 대한 의견

대중적 각성 없이 진정한 예술 발전 기대할 수 없어

2020년 10월 29일(목) 10:20
익산의 화가 김성민의 작업실, 1000호 정도의 캔버스에 갯벌을 그리고 있다.
익산 김성민 화가 갯벌작업
사실적 묘사와 추상적 암시
갯벌과 대화로 그림에 탄력

깨달음의 순간 저마다 달라
예술·정신적 문제의 비상은
관객의 성숙과 더불어 실현

중국 당·송 시기의 선불교를 기록한 벽암록을 보면 반산 보적화상이 깨달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반산이 탁발하고 다니다가 어느 푸줏간 앞에서 시주를 받으려고 목탁을 두들기고 있었다. 마침 손님이 와서 ‘좋은 고기로 주게!’ 했다. 그러자 푸줏간 주인이 ‘우리 가게엔 좋은 고기밖에 없소!’ 하고 골이 나 퉁명스럽게 받았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반산은 문득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깨달음의 순간은 저마다 다르기 마련이고, 선적인 화두와 더불어 가장 융성했던 시기의 선문답 이야기가 바로 벽암록이다.

전북 익산에는 큰 붓을 시원하게 휘둘러 주변 풍경이나 인물을 그리는 김성민이라는 화가가 있는데, 얼마 전 나는 그의 스튜디오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는 폭이 3.66m 정도 되는 1,000호 크기의 캔버스에 황량해 보이는 갯벌을 그리고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문화 예술 활동이 크게 위축되는 마당에 그는 오히려 새로운 주제를 설정해 창작 의욕을 북돋우고 있었다.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것은 갯벌에 대한 사실성과 추상성에 관한 것이었다. 갯벌을 탐방해서 기록한 사진을 두고 대형 작업을 펼치지만, 그림의 목적이 갯벌에 대한 사실적 묘사에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실적 묘사로서 시선이 느끼는 감각을 드러내되, 갯벌을 바라보는 마음, 갯벌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그 무엇을 추상적으로 암시함으로서 그림은 더 탄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작가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무엇 때문에 갯벌을 그리려고 하는지 민감하게 귀 기울이고 느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기다려야 하고, 또 다시 갯벌을 찾아가 바라보아야 한다. 술 좋아하는 그에게 나는 홀로 갯벌을 찾아가 친구와 대작하듯이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갯벌과 대화를 하기를 권했다.

큰 붓을 휘적이며 그리는 데 맞는 작업 도구.
익산에서 돌아오는 버스길에 전주 시내 어느 지점을 지나가는 순간 내 눈에 들어오는 약국 간판을 보고 나는 문득 의심이 사라졌다. 그동안 예술과 정신에 관하여 끊임없이 제기되던 의문들이 한 순간에 사라져버렸다. 이유는 모르겠다. 때가 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안들은 때가 있는 법이다. 태어나는 것도 때가 된 것이고 돌아가는 것도 때가 되어 간 것이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알던 화가 윤경희는 최근 갑자기 세상을 떴다. 갑자기라고 하지만 본인은 3년간의 암 투병 끝에 간 것이고, 단지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을 극도로 꺼려, 갑자기 간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때가 되어서 간 것이다.

2000년대 초, 전남대에 강의를 내려오면서 선암사, 송광사, 화엄사 등을 전전하면서 문창살에 조각된 꽃문양 등에 탄복하면서 전통적인 것을 어떻게 형상화할까를 고민하던 기억도 난다. 그녀는 실제로 전통 문양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현대적인 조형 언어로 화폭에 정성껏 그려 넣었다. 그녀는 유행에 민감한 현대 작가도 아니고, 인기작가도 아니지만 일생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렸다. 청춘시절 어쩌다 그림 이야기가 나올 때면, 예이츠의 싯귀에 나오는 ‘하늘의 융단’을 화포 위에 깔고 싶다고 하던 그녀는 작별 인사도 못하고 먼 나라로 떠났다.

윤경희 작 ‘사노라면’(2019년 작)
앞에서 언급한 반산 보적 화상은 법문에서 말하기를, ‘삼계가 텅 비어 있으니 어디서 마음을 찾겠느냐?(三界無法 何處求心)’고 했다. 기실 삼계가 텅 비어 있다면 가고 오는 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녀도 간 것이 아니다. 간 것이 아니라면 온 적도 없다. 항상 텅 비어 온 것도 아니고 갈 것도 없는 것이 그것이다.

젊은 시절 나는 현대미술 공부를 하면서 의문이 풀리지 않아 외국의 미술관과 베니스비엔날레 혹은 카셀도큐멘타 등 세계적 미술 현장을 방문하는 한편, 국제전 기획을 기회로 많은 작가과 기획자들과 만났다. 20여년이 흐른 다음에야 문득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는 느낌이 왔다. 그 후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바깥으로 돌던 관행이 사라졌다. 이젠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내가 마주치는 정신적, 예술적 사건들을 서술하고 논의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나 내 앞에 마주친 문제들이다. 그것이 무엇이건 내가 풀고 해결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내 앞에 주어진 현안 문제이다. 공안이고 화두이다.

예술 역시 장식품이 아닌 바에야 정신적 문제와 직결되며, 가장 자유롭고 다양하게 문제의 제기와 해결이 가능한 공간이다. 갈수록 상품화되는 예술 작품의 현실이 안타깝지만, 그것 역시 오늘의 예술에 주어진 화두라고 생각한다. 뛰어 넘을 것인가, 아니면 거기에 주저앉아서 비위나 맞추면서 연명할 것인가. 예술가에게만 주어진 문제는 아니다.

예술을 바라보는 관객 역시 같은 고민에 빠진다. 관객의 눈이 떠져서 예술가에게 상품적 가치를 요구하지 않게 될 때에 현대미술은 급격하게 발돋움하게 될 것이다. 관객의 눈이 높아져 예술가에 보다 더 고양된 작업을 기대하게 될 때에 한국의 미술계는 르네상스를 맞게 될 것이다.

마치 민주주의가 정치가들의 일방적 노선 투쟁이 아니라 민주 시민들의 각성과 비판적 견제로 당파성을 넘어 성숙된 기량을 발휘하게 되는 경우와 흡사하다.

대중적 각성 없이 진정한 예술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제도적 지원 시스템과 무관하게 예술적, 정신적 문제들의 진정한 비상은 관객의 성숙과 더불어 실현될 수 있다.

/장석원(미술평론가)
/장석원(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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