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즐겨찾기 추가
닫기
등을 밀고 가는 것은

정태헌(수필가)

2020년 10월 28일(수) 09:00
버스가 잠시 멈췄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 요깃거리를 사기 위해 가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빵 가게 앞엔 머리칼이 성성한 여인이 콜라병을 쥔 채 앞서 있었습니다. 여인이 건네받은 것은 종이봉투에 담긴 호밀 식빵이었습니다.

저도 먹을거리와 생수를 사 들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여인의 모습이 다시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인은 원탁을 앞에 두고 두 사람과 마주 앉아 있었습니다. 발길이 멈춰졌습니다. 여인의 옆에 앉아 있는 스물두어 살쯤 돼 보이는 청년 때문이었습니다. 청년은 고개를 한쪽으로 쳐들고 입을 벌린 채 헤벌쭉 웃고 있었습니다. 초로의 두 사람은 부부인 듯하고 청년은 여인의 얼굴을 빼쏜 것으로 봐서 아들인 듯싶었습니다. 부부는 입성이 허름했으며 얼굴이 메말랐지만 평온해 보였습니다.

청년은 정상인이 아니었습니다. 한쪽 팔은 떨고 있었으며 고개는 도리질하듯 좌우로 흔들어댔습니다. 정신지체와 행동장애를 겪고 있는 듯했습니다. 여인이 산 호밀 식빵이 생각났습니다. 그 빵은 가족의 점심일 것만 같았습니다. 과연 그랬습니다. 청년은 탁자 위에 놓인 콜라병을 보고 손가락질을 하며 빨리 달라고 의자에서 엉덩방아를 찧으며 졸랐습니다. 청년 혼자서 콜라를 먹을 수가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손과 얼굴을 마구 흔들어댔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보채는 몸짓을 보고 어머니는 알았다는 듯 다순 미소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가방을 뒤적이더니 손수건을 꺼내 탁자 위에 깔고 사 온 식빵을 양손으로 잘게 뜯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콜라 뚜껑을 힘겹게 이로 따고 그 속에 빨대를 꽂았습니다. 아들은 부모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발을 동동 구르고 팔과 고개를 흔들어댔습니다. 어머니는 그러한 아들의 입에 빵조각을 넣기 위해 덩달아 손이 따라 움직였습니다. 하나 아들의 입에 빵조각을 넣는 일은 쉽지가 않았습니다. 몸을 일으켜 입에 빵을 넣는 걸 성공한 어머니는 아들이 우물우물 빵을 씹는 모습을 보고 남편을 바라보며 손뼉을 쳤습니다. 아버지도 따라 손뼉을 치다가 아들의 입에 빨대를 물려 콜라를 빨아들이게 했습니다. 그러기를 몇 차례 반복했습니다. 그때마다 손뼉을 치는 부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부부의 낯빛은 맑은 웃음과 안도의 기쁨으로 투명했습니다. 속이 허출할 텐데 그들은 요기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부는 아들에게서 한시도 눈길을 떼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그들에게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가슴에 더운 기운이 우꾼하게 일고 눈시울이 화끈거려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어디선가 나직이 말이 들려왔습니다. ‘보기에 참 좋구나…, 고맙다…, 그래, 이제 좋으냐…, 그동안 애썼다…’ 그들 곁을 스치는 바람결이 빚은 환청이었을까요, 하늘에서 내려온 말이었을까요. 그 낮은 말은 부부의 가슴 저편으로 조용하고 섬세하게 흘러들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제겐 그렇게 들리고 느껴졌습니다.

승차 시각이 임박해 뒤돌아보며 버스에 올랐습니다. 차창 너머로 그들을 묵연히 바라보았습니다. 버스가 출발하자 그들의 모습이 스치다가 시야에서 가뭇없이 사라졌습니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라 그들의 모습이 차츰 제 가슴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그들 부부가 겪었을 세월의 뿌리 말입니다. 지난했을 세월을 견뎌낸다는 게 어찌 쉬웠을까마는 이젠 기쁨이 되고 웃음도 되는 모양입니다. 얼마만큼 고통의 산을 넘고 슬픔의 강을 건너야 저처럼 투명한 낯빛과 기꺼운 손뼉으로 바뀔 수 있는 걸까요. 불편하고 힘이 들뿐, 어쩌면 고통 속에 삶의 진실이 더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부부의 시리고 저렸던 속 그늘이야 어찌 가늠이나 할 수 있겠는지요. 하지만 부부에게 그 아들은 무른쇠를 모루 위에서 망치로 두드려서 단단하게 만든 시우쇠 같은 자식이었을 것입니다. 그 불편한 자식이 부부의 등을 여태껏 밀고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때까지 전 요깃거리를 손에 든 채였습니다. 목구멍으로 빵을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삶의 등을 밀고 가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실시간뉴스

많이 본뉴스

자치

전매인터뷰

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