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병원에서, 50대 중반 쯤 돼 보이는 환자가 입원 중인데 발목이 골절돼 수술을 했으나 핀을 제거하기 전까지는 잠자는 것 외에 머리감기, 옷 갈아입기, 소변통 비우기 등 모든 것을 보호자가 해 줘야 하는 환자다. 20대 후반의 아들이 환자인 엄마가 불편하지 않도록 항상 옆에 붙어서 환자가 요구하기 전에 먼저 알아서 지극정성으로 보호를 하는 것을 지켜보던 같은 병실의 다른 환자가 "아이고 아들이 딸 노릇을 하네"라고 하자 평소 말이 없고 조용하던 아들이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그런 말씀을 하세요"라고 하더란다. 그 환자는 순간 뒤통수를 강하게 맞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난감해 하더란다. 조용하던 사람이 서슴없이 말을 하는 것에 놀랐거니와 '딸 노릇' 이라는 말은 영락없는 성역할 고정관념이라 바로 성차별임을 순간 알아차리고 나니 한 대 얻어 맞은 듯 멍하더란다.

성차별에 대한 의식은 설문조사에서도 쉽게 나타난다.

형지엘리트의 교복브랜드 엘리트학생복은 7월 초 약 2주간 10대 청소년을 대상으로 사회에서 나타나는 차별에 대한 인식과 경험에 관한 설문을 진행 했다. 그 결과 청소년 4명 중 1명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만연한 차별로 '성 차별' 문제를 꼽았으며 다음으로 '외모 및 신체조건(24%)', '장애(13%)' 등을 꼽았다. 차별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대중매체나 교육을 통한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 변화(38%)가 가장 필요하다고 답변했다. 이외 '개인 스스로의 인식 개선 노력'과 '차별과 관련된 법령 개정'이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이러한 차별이 발생하는 주 원인으로 '부정적인 선입견과 편견(41%)'을 들었으며, 이외 '고정관념', '다양성이 부족한 사회' 등으로 답했다.

설문조사에서 10대 청소년들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만연한 차별로 '성차별' 문제를 꼽았듯이 정작 어제 오늘의 문제만은 아니다. 성차별은 인식변화가 되지 않는 한 폭력을 유발 시킨다.

폭력사건은 매일 매스컴에서 쉽게 접할 수 있고 인식변화가 되지 않는 한 장소, 대상 불문하고 발생할 수 있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외교관 성폭력 사건이 일례다.

2017년 뉴질랜드에서 근무했던 한국 외교관 A씨가 동성 부하 직원의 엉덩이와 가슴을 만지는 등 총 세 차례에 걸쳐 성추행을 한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바 있고 2016년 칠레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외교관은 미성년자를 성추행한 사실이 드러나 파면됐고, 지난해 일본 주재 한 총영사는 강제 추행 혐의로 국내에서 재판에 넘겨졌다.

국가를 대표해 해외에 파견된 외교관들의 잇따른 성 추문은 국제 망신이 아닐 수 없다.

그럼 직장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1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고용노사관계학회가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1.8%는 '달라진 것이 없다'고 답했다. 마땅한 후속 조치를 하지 않은 회사를 처벌할 근거가 없다는 법의 맹점 때문이다.

가장 모범적이어야 할 공공기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직장 내 괴롭힘을 호소하는 직원들의 감사 요청을 묵살하거나 신고 피해자에게 오히려 부당한 인사 조치를 내린 사례도 빈번하다. 직장에서 떠나게 되는 사람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이다.

국가를 대표해서 해외에 내보내더라도 인식이 변하지 않으면 장소와 대상 불문하고 성차별과 성폭력을 일삼을 것이며, 직장내 금지법 시행 1주년을 맞이하더라도 인식이 변하지 않으면 갑질, 성희롱, 부당한 처우 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인식이 변하지 않으면 할 일을 정해놓고 '딸 노릇', '아들 노릇'을 찾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 환자 보호자 역할을 하고 돈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 치료비를 책임진다고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가진 것이 없다고, 배움이 짧다고, 못 생겼다고, 힘이 없다고 차별 받을 이유는 되지 않는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재심으로 유명한 박준영 변호사가 강조한 헌법 제 10조에 담긴 내용을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