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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원의 현대미술에세이-질문과 대답<9> 인간은 욕망하는 것을 본다

“내 그림은 경락圖…내장까지 발가벗겨 욕망 비춰”

2020년 04월 23일(목) 09:20
‘마음의 집’(2019). 가면을 쓴 인물들, 눈이 여러 개 달린 인간, 경락도로 본 인간의 몸은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묻는다.
인간에 집중해 인간을 그리다
이중섭미술상 수상자 정복수
몸은 욕망의 통로…진실 토로


2019년 11월 7일 오후 2시경, 조선일보미술관 앞 카페에서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80년대에 미술 운동을 펼치며 겪었던 일들을 생각나는 대로 나누면서 곧 진행될 시상식에 대해 즐거워하고 있었다. 31회 이중섭미술상 수상자인 정복수 이야기이다.

그는 인간의 ‘몸’을 그려 주목을 받아 왔다. 그가 그린 몸은 대상으로서의 신체라기보다는 몸 자체, 인간의 몸이자 자연이고 우주의 축소판 같은 개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몸 가운데 눈이 여러 개 등장하기도 하고 몸속의 내장 기관이 말을 하기도 한다.

그는 말하기를 “내 그림은 경락도(經絡圖)이다. 내장까지 발가벗겨 욕망을 비춘다”고 했다. 한의학에서 보는 인체의 경락도처럼 인체의 맥락을 동양 철학에서처럼 읽으며, 인간의 욕망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인물화지만 이것은 시대의 초상화나 마찬가지다. 사람이 살면서 느끼고 번뇌하는 결과물이다.”, “우리는 눈이 두 개뿐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온 몸이 눈일지 모른다. 인간은 욕망하는 것을 본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인간은 욕망하는 것을 보고, 인간은 보고 싶은 것을 본다. 그러기에 그가 그리는 인간의 몸은 그려지는 대상으로서의 신체가 아니라 욕망하는 신체이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자신의 초상이기도 하다.

80년대 미술 운동이 한창이던 1983년 횡단그룹 테마전 ‘잡음, 혼선, 소란’전에서 정복수는 단 한 점의 대형 바닥화로 관심을 끌었다. 7명의 나체를 그려넣은 그 그림을 관객으로 하여금 밟고 지나가게 한 것이다.

‘바닥화’(1983). 80년대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때 그는 전시장 바닥에 그림을 깔고 관객들이 밟고 지나가게 하는 작품을 발표했다.
그때 작가의 생각은 천장화는 신, 벽화는 권력자, 바닥화는 평범한 사람의 영역이었다. 관람객이 그림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으로 그림 위에 담배꽁초를 버리고 발로 비벼 끄는 관객의 행위를 퍼포먼스로 받아 들였다.

서양미술이 표현하는 신체의 아름다움을 거부하기에 그의 시각은 그것에 대하여 대척적 입장에 서 있다. 서양미술에 대하여 그것이 아닌 독자적인 것, 우리만의 시각에서 비롯되는 창의성을 중요시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경락도의 맥락에서 ‘몸’을 바라보는 것은 몸이 곧 자연이고 우주이며 그 신체를 통하여 사람을 이야기하고 이 시대의 삶, 그리고 욕망을 말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무엇일까?

삶의 근원에 욕망이 있다는 것, 곧 삶은 욕망이라는 것을 작가는 당연하게 노출시킨다. 마치 자신의 몸을 태우면서 빛을 발하는 촛불처럼 인간은 욕망을 불태우면서 삶의 의지를 빛낸다. 몸은 욕망의 통로이며 진실을 토로한다.

‘몸의 초상’(골판지에 색연필, 1998). 압축된 인체의 본능과 생의 의지를 단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단호하게 작가로서의 길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인정받기 위하여 그리지 않는다. 내가 만족할 때까지 그릴 것이다.”

그 어떤 공모적 형태의 전시에 응하지 않고, 팔기 위하여 상업 화랑의 구미에 맞추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그리는 방식으로 자신을 지켜 왔다. 그가 자신만의 길을 가는 동안 화단과 갤러리에서 그를 향해 기웃거리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사회적으로 노출되어 왔다.

그의 자세는 변화가 없다.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감성이 있는데 아직도 서양미술을 흉내만 낸다. 고민하고 성찰하면서 자기 세계관을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자기가 표현하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 작업을 통해 고민해야 한다. 그림은 내게 생명이고 수행이다. 화가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목수나 수행하는 중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몸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몸이 곧 자연이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 그는 수행하듯이 그림을 그리면서 한 시대를 살아왔고, 자신의 관점인 ‘몸’을 통해 세상에 대하여 말해왔다. 그 일관된 자세가 그를 우뚝 서게 한 것이다. 그는 늘 말을 더듬지만 생각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오로지 자기 그림을 그리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자세가 정결하다.

이중섭미술상 수상 이후 지난 1월 그는 아내 박미정과 함께 전주를 방문했다. 그동안 작업실에만 있다가 첫 외출이라고 했다. 손에는 지난해 10월 담양 담빛예술창고에서 참여했던 ‘당신의 몸이 신자연이다’ 도록이 들려 있었다. 그 도록에는 얼굴에, 몸에 그려진 수많은 얼굴과 몸의 기록이 있었다. 그에게는 ‘몸’이 삶의 전투장이다.

인생의 일기’(2003~5). 인체의 경락 중간 중간 삶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조선일보미술관에서 봤던 근작 중에는 얼굴 위에 가면이 있고 가면의 바깥과 안에 모두 얼굴이 들어 있는 그림이 있었다. 인간은 모두 가면을 쓰고 산다. 가면의 겉에도 눈이, 속에도 눈이 들어 있다. 눈은 밖을 바라보며 안의 마음을 드러낸다. 안과 밖을 드나드는 통로이다. 가면 밖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관객은 안의 얼굴을 들여다보려 애쓴다. 그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다.

80년대에 형상미술 운동에 참여하면서 격정적으로 “그림이라는 것은 살아 움직여야 한다. 춤도 추고 고함도 지르고 말도 하고 사랑도 하고 술도 마시고 미워도 하고 사람이 살아가듯 살아있어야 그림이다. 그리기란 잘 포장된 도로 위를 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길을 다시 만드는 것이다. 그것도 맨 몸으로”(1983)라고 외마디처럼 주장하던 그는 민주화가 성취되고 세월이 흐른 지금도 시대적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의 정신은 그 흐름과 함께 깨어 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기괴해 보인다는 일반적인 질문에 “내가 그린 그림이 기괴하다고? 평양 남북축구 만큼 괴상하겠는가?” 하고 반문했다. ‘인간에 집중해 인간을 제대로 그리려 한 화가’로 자임하면서 그는 아직도 호기심 덩어리 소년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그가 말하는 욕망이란 어린아이가 천진난만하게 원하는 바를 요구하듯이, ‘몸’이 가진 원초적 기제로서의 본능을 인간의 근본으로 보고 세상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리라. 그의 경우 깨달음이란 세상과 몸을 통한 인지, 몸을 태우며 빛을 내는 촛불과 같은 종류의 각성이 아닌가 한다.

/장석원(미술평론가)
/장석원(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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