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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장이의 말씀

정태헌(수필가)

2020년 04월 08일(수) 09:19
정태헌
그늘이 가게인 셈이다. 가게라야 한길 가 육교 밑 그늘 두어 평이다. 의자 두 개가 놓여 있는데, 한 의자엔 늙숙한 구두장이가 앉아 있다. 가죽칼 못 나무망치 등이 담긴 공구 상자와 밑창 깔창 구두약 구둣솔 접착제 사포 나부랭이들이 장사 도구 전부다. 한데도 육교 기둥에 ‘구두병원’이라고 쓴 종이 간판을 조잡하게 내걸어 놓았다. 오가는 이들이 이 어쭙잖은 상호를 보고 코웃음을 칠지 미소를 띨지 정색을 할지 자못 궁금하다.

그늘 가게로 들어선다. 손님이 뜨음할 때, 구두장이는 책을 읽든지 오가는 이들의 신발을 바라보든지 허공에 눈길을 주든지 한다. 오늘은 책을 읽고 있다. 인기척을 하자 구두장이는 구두를 내려다보더니 앞 의자를 가리킨다. 책을 접어 공구 상자 위에 놓은 후, 벗어준 구두를 들고 요리조리 살피더니 앞에 앉은 손님을 찬찬히 뜯어본다.

한데 그의 표정이 별로 탐탁지 않아 보인다. 제 발 저린 격이었을까. 구두를 신다가 닳으면 새 구두로 바꾸었을 뿐, 밑창을 덧대거나 뒤축을 수선해 신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구두는 소모품에 불과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구두장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무슨 일을 하느냐고 은근히 달구친다.

직업까지 묻는 게 마뜩찮아 대꾸를 하지 않자 되알지게 말을 뺀다. 사람들이 구두를 왜 그리 험하게 신는지 모르겠다는 게다. 뒤축이 꺼지도록 닳아도 나 몰라라 하는, 볼이 터져도 단속하거나 꿰매지 않는, 멀쩡한 구두를 꺾어 신는, 죄 없는 구두를 질질 끌고 다니는, 구두끈이 제멋대로 나풀대도 아무렇지 않은, 구두약은 고사하고 솔질 한 번 하지 않은 사람들이 뜻밖에 많다는 게다.

그 말 속엔, 당신 또한 그런 부류에 속하지 않느냐는 나무람으로 들린다. 게다가 직업까지 들먹거리는 통에 속이 뜨끔하다. 하나 수선하고 돈만 받으면 될 일이지 무슨 참견이 많으냐는 말이 슬그머니 목구멍까지 치오른다. 구두장이 마누라보다 더 험한 신발을 신고 다니는 사람을 보았느냐고 되쏘고 싶지만 그저 삼킬 뿐, 그의 손놀림만 바라본다.

구두장이는 사포로 밑창을 말끔히 닦아내고 그 위에 접착제를 바른다. 창을 덧붙이기 위해서다. 새 밑창을 붙여 말린 후, 양쪽 굽에 말편자 모양의 닳음 방지용 보조 굽을 각각 덧대어 다시 말린다. 잠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더니 가죽칼을 집어 든다. 덧댄 밑창 거스러미를 가죽칼로 말끔하게 다듬는다. 다음엔 보조 굽에 못을 몇 개 쳐 단단히 고정한 후, 모르쇠 위에 놓고 나무망치로 자근자근 두들겨 마무리한다. 그리고는 구두 속에 새 깔창을 밀어 넣는다. 솔질한 후 구두를 가지런히 앞에 놓으며 툽상스럽게 한 말씀 내던진다.

“허어, 뒤축이 이 모양이라니, 구두는 마누라와 같은데….”

되쏘고 싶었던 마누라 말을 외려 먼저 꺼내 구시렁거린 후, 작정한 듯 덧붙인다.

“걷다 보면 뒤축이 닳는 것은 당연하지요. 뒤축 바깥쪽이 먼저 땅에 닿고, 밑창 안쪽을 디딘 다음, 엄지발가락을 튕기며 구르듯이 밟으니까요. 이때 굽 바깥쪽과 안쪽은 그 사람의 걸음걸이에 따라 닳는 방향과 정도가 다르지요. 대부분 굽 바깥쪽이 닳지만 그 방향이나 각도는 걷는 버릇이나 인생살이와 닮았다고 할 수 있지요. 손님처럼 닳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지만….”

구두장이가 손님보다 구두를 먼저 본 이유는 이래서였을까. 속이 더 켕긴다. 이쪽 굽은 안쪽이 꺼지고 저쪽 굽은 바깥쪽이 닳은 비대칭이라니, 그렇다면 그동안 엇박자로 꼬인 세월을 살아온 셈이란 말인가. 그의 기준대로라면 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위인임이 분명하다. 자신은 스스로가 더 잘 아는 터, 구두장이의 말만 듣고 어찌 이런 생각을 하랴.

가장 밑바닥에 감춰진 구두 뒤축 하나로도 속살이 이리 드러나는데, 훤히 내보이는 바깥의 지질한 부분들은 무엇으로 감출 것이며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구두를 수선하는 병원이라지만 사람에 따라선 구두만 다루는 게 아닌 모양이다. 오늘은 뜻밖에 ‘구두병원’에서 뒤틀리고 얼크러진 마음자리를 덤으로 진료 받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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