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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원의 현대미술에세이-질문과 대답<6> 위대한 종신수, 김환기

향토적·민족적 예술성이 세계성과 조우했을 때
독자적 세계 구축했던 뉴욕에서의 11년
고국에 대한 그리움, 완전 추상에 담아
“세계적이려면 한국적이어야 해”
늦었지만 자신만만했던 위대한 ‘종신수’

2020년 03월 12일(목) 10:02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김환기의 작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밤하늘의 별처럼 촘촘하게 찍힌 점들로 이뤄진 추상화, 당시 화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1963년 도미 이후 작가의 변모를 실감케 하는 작품이었다. 화면 가득 수많은 점들이 찍힌 그 작품은 한국 화단에 충격을 주었다. “세계적이려면 한국적이어야 해”라고 하던 그는 자신이 즐겨 다루던 새, 달, 항아리, 산 등의 소재가 보이지 않는 완전 추상, 그러나 그 추상성 안에는 고국을 그리워하는 작가 특유의 그리움이 하나하나의 별처럼 빛나는 서정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사후 점으로 가득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시리즈는 국제적으로 평가를 받으면서 그를 한국 최고의 작가로 조명하고 있다.


1976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회고전 당시 한 관중이 “육시랄 점도 많이 찍었군. 지겹지도 않았을까?”하는 소리를 듣고 분노를 느꼈다는 전 이경성 관장의 회고는 흥미롭다.

“…사실 그 ‘육시랄 관람객’은 그 자신 무수한(무진장의) 점 하나임을 몰랐던 것이었으며 ‘당신이 바로 이 점이오’ 해봤자 그것이 통할 리 없다는, 대화가 끊기는 느낌을 필자는 실감했을 뿐이었다.”(이경성, ‘내가 그린 점 하늘 끝에 갔을까’, P. 151)

다행히 현대인들은 수화 김환기의 작품 세계를 잘 이해하고 깊이 사랑하고 있다. 2019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김환기의 작품 ‘우주’가 130억이 넘는 가격으로 거래된 것도 그 반증으로 볼 수 있다.

1970년 쓴 김환기의 일기에서는 “내가 그리는 선(線),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點),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김광섭의 시 ‘저녁에’에서의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고 했듯 그는 무수히 떠오르는 고국의 지인들을 그리워했으리라.

신안 안좌도에 그려진 김환기 작품 벽화.
수화 김환기는 1913년 2월 17일 전남 신안군 안좌면 가좌도에서 태어났다. 문간에 나서면 바다 건너 동쪽으로 목포 유달산이 보이고, 목포항에서 백 마력 똑딱선을 타면 호수같은 바다를 건너서 두 시간이면 닿는다는 ‘그저 꿈같은 섬’이었다.

김환기가 본격적으로 미술 수업을 쌓았던 일본 유학은 ‘가출’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의 아내 김향안의 술회에 의하면, “1933년 4월 수화는 동경유학을 약속해놓고 이를 이행하지 않는 부친에게 분개해서 가출하여 밀항으로 동경에 갔다. 고학을 각오하고 자력으로 공부하려고 했으나 가출에 놀란 부모는 곧 학비를 송금했으므로 김환기는 일본대학 미술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김향안의 본명은 변동림이며 수필가다. 1936년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과 결혼했다. 이상이 폐결핵으로 사망한 이후 김환기와 재혼했으며, 김환기 사후 남편의 유작을 돌보며 1992년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자비로 환기미술관을 설립했다.

키가 크고 자유주의자이며 격정적이기도 했던 김환기에 비해 키가 작고 낙천적이며 차가운 이성을 지녔던 김향안에게 김환기는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어리광을 부리듯이 모든 것을 의지했다. 또 누가 보더라도 김향안의 일생은 예술가 수화에게 바친 반려자의 그것이었다’고 한다.

1952년 김환기가 쓴 글에 아내 이야기가 나온다.

“아내는 내가 술을 마시든, 게으름을 부리든 아무 소리가 없다. 돈을 못 벌어오는데도 아무 소리가 없다. 먹을 것이 있든 없든 항상 명랑하고 깨끗하다. 아내는 능금을 좋아하는데 궤짝으로 사다두고 먹어본 적이 없다. 과용(過用)하고 돌아오는 길, 가다가 몇 알 사들고 와서 손에 쥐어주면 어린애같이 좋아한다.”

아내이자 친구이고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김향안의 모습이 그려진다.

1957년 파리 베네지트 화랑의 김환기 초대전 포스터.
1963년 김환기는 제7회 상파울로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선정되어 6월 브라질로 향한다. 그는 이때의 상파울로비엔날레에서 특별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그해에 뉴욕으로 건너가 1974년 7월, 뇌일혈로 사망할 때까지 11년간 뉴욕 시대를 연다. 최후의 승부를 펼치기 위하여 뉴욕 행을 결심했고, 작품에 있어서도 극적인 변모를 거치면서 독자적인 세계를 열었던 그는 끝내 한국 땅을 밟지 못하고 말았다.

1974년 뉴욕에서의 마지막 일기를 보자.

6월 24일. 일하다가 내가 종신수(終身囚)임을 깨닫곤 한다. 늦기는 했으나 자신은 만만.
7월 9일. 어젯밤 최순우씨 꿈을 꾸다. 이상도 하지. 정신이 없다. 오늘 아침 일어나 어제치 일기를 꼭 쓴걸로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이렇게 정신이 오락가락하니 야단났다.
7월 12일. 해가 환히 든다. 오늘 한 시에 수술. 내 침대엔 ‘NOTHING BY MOUTH‘가 붙어 있다. 내일이 빨리 오기를 기다린다.

이후 김향안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7월 14일 새벽. 환자가 침대에서 떨어졌다는 전화를 받고 달려가다… Stroke. 뇌일혈이 일어난 걸로 진단. 의식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12일간 인공호흡으로 계속하다. 1974년 7월 25일 9시 40분 운명하다.

죽음을 예감한 것일까? 그는 뉴욕에서 새로운 추상성을 전개하면서 자신 만의 예술 세계를 열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종신수’라고 표현했다. 그는 죽음으로 그 종신수 처지를 벗어났을까? 그가 그린 뉴욕 시대의 그림들은 한국의 향토적, 민족적 예술성이 세계성과 조우했을 때에 어떠한 창의력을 발휘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위대한 종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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