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즐겨찾기 추가
닫기
장석원의 현대미술 에세이-질문과 대답<3>소치 허련과 박문종

전통의 파괴를 통한 전통의 재창출

2020년 01월 30일(목) 10:35
소치 허련 작 ‘매화서옥도’. 눈이 덮혀 천지가 하얀 공간을 한 선비가 걸어 집으로 가는 모습이다.
미산 허형이 그렸다는 소치 허련(1808-1893)의 초상화.
추사로부터 극찬받았던 소치
남종화 대표적 존재 자리매김


박문종, 자유분방한 실험적 수묵
전통 파괴로 정통성 역설적 강조



예향 남도의 근거지로 여겨지는 진도의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에 소치 허련이 자리잡은 곳이다. 소치는 28세에 동다송을 지은 초의선사의 배려로 해남 연동의 녹우당을 찾아가 ‘공재화첩’을 빌려 그림 공부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839년 봄 초의는 교분이 두터웠던 추사 김정희에게 소치의 그림을 보낸다. 추사는 소치의 그림을 보고 칭찬하며 서울로 오도록 권유한다. 32세의 소치는 서울 장동의 추사 자택 월성위궁에서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받게 된다. 당시 명망을 떨치던 김수철, 이한철, 유재소, 전기 등 화가들과 교분을 갖게 되고 추사의 소개로 문무를 겸비한 신관호, 영의정을 지낸 권돈인 등을 알게 되어 후원을 받게 된 것이 소치를 중앙 화단에서 남종화의 맥을 잇는 중요한 화가로 인정받게 되는 기반이 된 것이다.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던 시기(1841-7)에 세 번이나 찾았던 것도 소치의 수업기에 중요한 일로 꼽힌다. 추사의 정신성을 최고조로 반영하는 ‘세한도’가 제주도 적거 시절을 그린 것임을 감안할 때, 소치는 당대 최고의 스승으로부터 남종화의 정수를 터득했다고 볼 수 있다.

칭찬에 인색했던 추사로부터 ‘압록강 이동에는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거나 ‘소치 그림이 나보다 낫다’는 등 극찬을 받았던 그는 1846년 권돈인의 집에 머물면서 헌종에게 그림을 바치기도 하고 임금 앞에서 지두화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의 교유는 다산의 큰 아들 정학연, 당대의 권세가인 김흥근, 만년에는 대원군 이하응 그리고 민영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무엇보다 원말 4대가로 꼽히는 황공망과 비유되어 소치라는 호를 얻었고, 대표작인 ‘설경산수도’나 진도의 운림산방을 그린 선면의 ‘산수도’는 그가 조선조 남종화의 대표적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됨을 알 수 있다. 그는 대를 이을 제자들을 양성하지는 않았지만 작업 양이 많고 호남에서 그의 맥을 잇는 작가들이 나타남으로서 자연스럽게 남도 예향의 원조로 꼽히게 되었다.

미산 허형, 남농 허건, 의재 허백련, 아산 조방원 등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남종화는 근대적 변모를 거듭하면서도 남종화를 토착적인 가치로 심화시켜 왔다. 더구나 급변하는 현대미술의 정황 속에서 전통적인 남화가 어떻게 객관적으로, 국제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가의 문제는 쉽게 결론낼 수 없는 뜨거운 화두로 남아 있다.

소치로부터 아산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남종화의 맥은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전통적인 화풍이 호남에서 토착화되는 과정을 말한다. 그러나 현대의 실험적 수묵은 파격적 변신을 예고한다.

뿌리고, 흘리고, 그리고 농사짓는 방식과 유사하게 그림 그리는 행위를 실연해 보이는 화가 박문종.
박문종 작 황토밭에서-다산도
담양에 화실을 짓고 사는 박문종은 70년대 중반 연진회에서 전통 기법을 배웠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대학에 진학해 현대 화풍을 배웠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민중미술이 크게 대두되자, ‘어머니’ 또는 ‘인물’이라는 이름으로 민중적 초상을 먹으로 묘사해내며 주목을 받았다.

그 후 담양에 들어와 살면서 농사짓는 사람들의 풍경을 그림으로 끌어들여 토착적이고 독자적인 세계를 열고 있다. 그는 화선지 대신 신문지와 화선지 그리고 골판지가 배접된 종이를 쓰기도 하며, 논바닥에서 채취한 황토와 먹을 같이 사용하고 때로는 논두렁에 종이를 펴놓고 그 위에 원초적 여인상을 그려내기도 한다.

지형에 따라 자연스럽게 굴곡진 화면에 황토를 한줌 움켜쥐고 조금씩 뿌리기도 하며, 황톳물이 자연스럽게 배이도록 뾰족한 나뭇가지로 구멍을 내기도 하고, 그 위에 자연스럽게 형상화하는 인물상은 지극히 단순화된 원초성을 보여준다. 그는 농사짓는 모습에서 그림이 나아가야 할 바를 체득한 것으로 보인다.

2015년 대인시장에서 벌인 퍼포먼스에서는 바닥에 대형 신문 배접지를 깔아놓고 그 위에 맨발로 올라가 주전자에 든 먹물을 따르면서 논두렁의 길처럼 질서 있는 획을 가지런히 긋고 다니더니 이번에는 황톳물을 손바닥에 받아 그 위에 흙냄새 나는 신체적 흔적과 드로잉을 더했다.

그리고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나와 그 위에 뿌리면서 퍼포먼스는 어느덧 제의적 속성까지 띄게 되었다. 대인시장에서 막걸리 마시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먹물과 황토에 더해 막걸리를 추가시킨 그의 행위는 그의 예술에 대한 생각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미친 듯이, 취한 듯이 그는 화법이나 의미를 버리고 맨발로 그림 위에 올라가 선을 긋고 황톳물을 뿌리고 구멍을 내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법식에 얽매이지 않는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그가 사랑한 농촌에서의 삶 그리고 대인시장 안에서 마주치는 서민들의 애환 그것이 관객들의 공감으로 표명되어 나타난다.

박문종 작 ‘들에서2’
박문종 작 ‘오감도’
전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기이한 행태를 보이지만 묘하게도 전통성이 강조하던 자유분방함이 리얼하게 드러나고, 관념화되고 형식화된 전통성에 파격적인 출구를 열어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전통의 파괴를 통한 전통의 재창출, 그때의 모습은 전통성과 매우 다르게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더욱 정통성을 느끼게 하는 예술적 반란이다.

한국의 남종화는 조선조로부터 내려온 전통을 잇되 전통을 답습하는 차원을 벗어나야 한다. 전통을 익히되 버릴 줄 알아야 길이 열린다. 충분히 익히고, 충분히 버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절체절명, 너무 익숙해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면 더 나아갈 길은 없다.

전통은 좋은 것이지만, 현대적 창의성을 죽이는 독소일 수도 있다. 인간의 본성에 들어있는 예술적 표현 욕구와 자유분방함이 권위적 틀에 의해 구속될 때 예술가는 반항을 해야 한다. 치열하게, 가장 예술적인 방법으로….
/미술평론가

실시간뉴스

많이 본뉴스

자치

전매인터뷰

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