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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원의 현대미술 에세이- 질문과 대답<1>오지호와 광주비엔날레

자연에 대한 감격의 표현, 그의 구상화론에는 감동이…

2020년 01월 02일(목) 15:52
추상미술을 ‘장식도안’의 일종이라고 비판하면서 구상회화야말로 회화의 본질을 구현한다고 밝혔던 오지호. 그는 민족적 감성의 한국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풍을 구축했다.
2020년 새해를 맞아 ‘장석원의 현대미술 에세이-질문과 대답’ 연재를 시작합니다. 격주 금요일자 주말 지면에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장석원의 현대미술 에세이-질문과 대답’은 확장된 예술의 관점에서 현대미술 현장과 작가를 조명하는 기획입니다. 동시대 사회의 이슈와 현대를 살아가는 삶을 미술로써 성찰해보는 서술이 될 것입니다.

미술평론가 장석원은 홍익대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1984년부터 2015년까지 전남대 교수를 지냈습니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전북도립미술관장을 역임했으며, 2004년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 2009년 국제아트비전 ‘ASIA PANIC’ 총감독 등을 맡아 교육자로서, 미술기획자로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편집자 주>



오지호 작 ‘남향집’(1939). 초가집 일우를 배경으로 따스한 햇볕을 받고 있는 나무와 청색과 보라색으로 투명한 느낌을 주는 그림자, 문을 열고 나오는 소녀, 그리고 담 밑에서 졸고 있는 삽살개. 정겹고 따스한 감성이 흐르는 작품이다.


광주비엔날레, 한국 화단 구조 바꿔
기획자 중심 미술…창의·관계성 중시
‘감동’ 없는 예술은 정략적 행사 변질



작고하신 천경자 화백이 오지호 선생을 회고하며 쓴 글이 있다.

“…선생님이 오신 그날 나는 선생님을 모시고 집을 나와 당시 종로 신신백화점 앞까지 계속 걸었는데 선생님의 짭잘한 이야기가 참 재미있어 낄낄거리면서 선생님 뒤를 따랐다. 선생님은 앞서시고 뒤따라가는 나에게 그 깐깐한 성품에서 튀어나오는 쓰디쓴 유머가 어찌나 웃기시는지 계속 낄낄대며 종로거리를 누볐다. 선생님은 못된 인간들을 가리켜 ‘저것들 다아 축생이랑께…’, ‘축생, 하하핫… 불쌍하당께…’”(지산동 초가와 화실, P. 46, 미진사, 1992)

종로 네거리, 맑은 하늘 아래 선생님의 구수하면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메아리쳤다. 오랜만에 상경한 오지호 선생이 후배되는 천경자 화백과 종로 쪽으로 이동하면서 즐겁게 담소를 나누며 낄낄거리는 장면이다. 모두 고인이 되셨다.

2020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오지호 선생을 떠올리는 이유는 그가 여전히 호남 화단의 상징적 거목이고, 지금까지도 그만한 어른이 안계시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부터 만들어진 오지호 신화는 현대미술이 팽배한 오늘의 시점에서도 유효하다. 오히려 요즘같이 각박한 현실에서는 맨 처음 서술하고 있는 낄낄거리는 장면까지 인간적인 매력으로 다가온다.

오지호는 1905년 전남 화순군 동북면에서 출생, 1931년 일본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했고, 1938년 김주경과 최초의 칼라 2인 화집을 만들었다. 1949년 조선대 교수로 초빙되었다.

1959년 자유문학지에 ‘구상회화선언’을 발표했고, 1967년 미술론집 ‘현대회화의 근본문제’를 발간했다. 1969년부터는 한자폐지반대운동에 헌신했으며 1976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에 추대되었고, 1982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했다.

이러한 짧은 이력의 서술은 그 사람을 정의하지 못한다. 그의 예술관을 살펴보려면 1959년에 기고했던 ‘구상회화선언’의 한 대목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회화활동은 외부세계에 대한 감격을 그것의 출발점으로 한다. 자연에 대한 감격은 자아를 대상과 일치시킬 때 성립되는 감정이다.…회화는 자연에 대한 감격의 표현이다. 바꾸어 말하면, 현실자연을 기계적으로 관찰하는데 의한 자연의 외모의 복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회화는 현실자연의 이형과 꼭 같을 필요가 없고, 또 그럴 수도 없다. 즉, 감격의 물결이 굽이치는대로 화필을 움직이면 화면 위에는 스스로 자연의 외모와는 같지 않은 형상과 색채가 나온다.’

자연에 대한 감격의 표현, 그의 구상화론에는 감동이 있었다. 단순히 자연의 외모를 닯게 그리는데 만족하지 않고, 자연에 대한 감동을 색채와 형태로 끌어내어 마음의 세계를 표현하려는 것이다. 오지호 선생 때문에 광주·전남의 구상 화맥은 단단하게 구축되었지만, 장기간의 형식화는 별다른 출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 창설 개막식 광경. ‘경계를 넘어’를 주제로 62일 동안 열린 행사에 160만명이 넘는 관객이 들어 대성황을 이뤘다. 이후 광주비엔날레는 아시아 대표 비엔날레로 성장했다.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 입장 인파. 9월 20일부터 11월 20일까지 두 달간160만을 상회하는 관중이 몰려들면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1995년도 광주비엔날레가 창설되면서 광주에는 지속적으로 세계적인 현대미술이 소개되어 왔다. 그 간에 광주 화단 역시 점차 현대적인 방향으로 변모되었다.

첫 광주비엔날레가 열렸을 때 160만을 상회하는 관중이 몰려들면서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 숫자는 회를 거듭할수록 줄어들어 이제 20여만 선을 유지하고 있다. 광주비엔날레는 공모전, 학벌, 유파 등으로 나뉘어 경쟁하던 한국 화단의 구조를 바꾸었다. 기획자 중심의 현대미술 그리고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창의성과 관계성이 중시되기 시작했다.

공모전에 익숙해 있던 광주 화단은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형성되어 왔던, 예향의 자부심을 느끼게 하던 작품들은 광주비엔날레 본 전시 어느 구석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충격을 점차 벗어나 새로운 자극에 적응하는 구조로 변화하는 데에 20여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볼 수 있다.

지금 광주는 광주비엔날레 뿐 아니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까지 더해져서 국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구들의 운영, 실태 등을 보면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 여러 가지 문제들이 지적되어 왔지만 선진적인 형태로 전환되지 못하는 것은 민관 합작 형태의 부조화와 전문적 기획 관리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못하는 점 등으로 이는 쉽게 고쳐질 것 같지 않다.

외부적 시각으로 보면 너무 정치적인 구조에, 정치적 운영의 틀을 벗지 못하고 있다. 어디 광주비엔날레 뿐일까? 대한민국의 중요한 미술 기구 운영 전반에 정치적인 입김은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이것이 미술 문화의 선진화를 향한 발목을 잡고 있다고 생각된다.

새삼 오지호 선생이 그리운 것은 그분이 살던 시대가 대한민국 건국 무렵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지사적 풍모의 예술적 이념을 정착시키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하던 거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따르는 많은 후배들을 가르치면서 비판과 격려를 아끼지 않던 어른, 가족처럼 긴밀해지는 인간관계 속에서도 끊임없이 존경을 받던 인품 때문일 것이다.

한 인간의 인품이 거대한 미술 기구보다 더 위대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껍데기가 거대하고 그 운용이 아무리 요란해도 그 중심에 사람의 마음을 끌어들이고 공감케 하는 것이 적으면, 비대한 연례행사로 전락하고 만다. 오지호의 화론 중에 ‘감동의 표현’이라는 그 감동이 빠진다면, 그것은 예술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정략적인 문제로 변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우리들 가슴 속에 축적된 기대, 바램, 희망 등을 구현시키는, 켜켜이 쌓인 생의 굴곡 속에서 간절히 희구하는 그 무엇이 눈앞에 현현하기를 바라는 갈망이 극적으로 해소되는 순간을 예술이 선물처럼 열어 보여 줄 수 있는 게 아닐까?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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