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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기 박사와 함께하는 <인문학으로 세상보기> 고전은 아이디어의 수원지다-형식지·암묵지에 대하여(3)
2018년 03월 29일(목) 17:34
명시지와 암묵지가 단순한 지식의 구분 및 정의 차원을 넘어, 현실에서 첨예한 대결 구도를 형성하는 경우도 있다. 다름 아닌 불교의 역사에서다. 그것도 자그마치 1,500년 동안이나.

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교종이고 다른 하나는 선종이다. 교종은 '교리, 경전 등을 배우고 학습'함으로서 '단계적으로 깨달아'(漸悟) 궁극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 선종은 '참선이나 공안(화두) 참구(집중 몰입)' 등을 통해 스스로 어느 때 '순간적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입장이다.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보편화 된 선종은 달마대사를 종조로 하는데, 그 선 수행법의 근거는 다름 아닌 부처의 영산 설법에서 찾고 있다.

바로 부처가 영산에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아무 말 없이 '연꽃을 손에 들고 제자들에게 보여주자', 제자 중 가섭이 '손에 든 꽃을 보고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이 때 '문자에 의존하지 않았으며', 말이 아닌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이 전달되었으며', '직접 가르치는 것이 아닌 방식으로 가르침이 전달되었으며', 귀나 눈이 아닌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리켰으며', 부처의 말없는 가르침으로 가섭이 '자신의 내부의 불성을 본 순간 바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설법이다. 정확히 '암묵지'를 나타내고 있다.



불교에선 1,500년간 대결 구조



선종에 있어 '깨달음'이라는 것은 '말'로 전할 수 없고, '문자'로 전할 수 없고, 직접 '가르칠' 수 없고, '스스로 깨달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달마대사가 6세기에 선 수행법을 시작하기 전 '깨달음', 즉 지식 중의 최고의 지식에 대한 앞선 고민이 있었다. 도생이라는 인물이 '깨달음'이라는 것이 과연 '논리적·언어적·단계적'으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회의를 한 것이다. 명시지·암묵지 형식으로 말한다면, '깨달음'까지도 '명시화·형식화'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은 것이다.

결과는 '아니다'였다. '깨달음'이란 '직관적·비언어적·즉각적'인 것으로, 진리를 조금씩 나누어 깨닫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결론이었다. 깨달음이란 '명시지'가 아닌 바로 '암묵지'라는 결론이었다. 도생 정도 깊은 회의까지 하지 않더라도 사실 일상에서의 경험을 통해 보통 사람들도 갖을 수 있는 통찰이다.

자전거가 한 쪽으로 기울 때 넘어지지 않고 금방 똑바로 달릴 수 있게 하는 그 몸짓 느낌, 수영할 때 물을 먹지 않고 부드럽게 호흡이 되는 그 편안한 느낌, 골프 칠 때 공이 정확한 방향으로 빨랫줄처럼 뻗어나갈 때의 그 간결한 타격 느낌. '작은 깨달음'이지만 그 느낌을 사람들이 스스로 느껴보지 않으면 알 수 없고, 당연히 누구에게 설명하기도 어렵고 또 설명을 듣더라도 충분히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선종에 비해 교종은 당연히 '명시지'적 입장이다. '경전'을 학습함으로써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입장에서, 그 깨달음의 주요방법으로 삼는 학습의 대상이자 수단인 '경전' 자체가 바로 '명시지'이기 때문이다.

중국 명나라 말기의 시인 오위업(1609-1671)은 '황제가 글자를 만들어 놓고 근심을 한 나머지 밤새 울었다'고 읊고 있다(전창선·어윤형,음양오행으로 가는 길,2005,세기,280면 참조). 문자가 결국은 사람을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이라는 시인 자신의 통찰을 황제의 눈물을 빌려 드러내고 있다.



기원전부터 존재했던 동양 지혜



성인 공자(BC551-BC479)는 일찍이 '문자는 말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고, 말은 생각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다'(주역,2012,명문당,518면)고 말했다. 오늘날 지식경영에 있어 핵심인 명시지·암묵지 개념은 동양에서는 지식 아닌 지혜로 이미 기원전부터 존재했었다. 다만 근대 이후 물질문명에 취해 정신문명에 있어서까지 서양 것만 좇다 보니 동양의 '오래된 책'들이 우리의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었을 뿐이다. '옛 것을 따져 봄으로써 새 것을 안다'의 온고지신(溫故知新)에서의 '옛 것', 즉 '고(故)'는 '서양의 옛 것' 이전에 먼저 '동양의 옛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것이기에 그렇기도 하고 정신문명에 있어서는 분명 더 동양이 풍요롭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인문경영 작가&강사·경영학 박사

※출처: 신동기 저 '오래된 책들의 생각'(2017, 아틀라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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