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중략)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중략)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시인 한하운이 가도 가도 천리 먼 길이라 울부짖었던, 작가 이청준이 감금, 강제 노역, 단종 시술의 끔직한 그늘을 그렸던 섬.
유폐된 한센인들의 슬픈 역사를 오롯이 간직한 섬.
그 섬 소록도(小鹿島)가 2013년 새해, 바깥세상과의 아름다운 동행을 시작한다.
그 하나는 국립 소록도병원이 오는 2016년 5월 개원 100주년을 맞는 기념사업으로 소록도 한센병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한다는 것.
또 하나는 고흥군의 한 미술관이 소록도에서 생활해 온 한센인과 의료진들의 얼굴을 병원 옹벽에 이미지로 새겨 넣는 벽화 작업을 한다는 그것이다.
오늘에 이른 소록도 100년, 그 역사의 한 갈피를 장식할 뭍사람들의 아름다운 동행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들여다봤다.

◇역사 교육의 장으로
일제강점기인 1916년 ‘자혜의원’으로 설립된 국립소록도병원은 오는 2016년 5월 17일이면 개원 100주년을 맞는다.
개원 당시 국내 유일 한센병 전문의원이었던 소록도병원은 1934년 일본 총독부가 자혜의원을 소록도 갱생원으로 개편하면서 한센인들을 가두는 감옥이 됐다.
한센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박해와 격리의 대상인 ‘죄인’이 됐고, ‘천형의 땅’으로 불린 것도 이때부터다.
병원이 설립된 이후 소록도 한센인들은 천형의 땅, 그곳에서 수많은 고초와 비운의 세월을 보냈다.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커다란 상처를 입기도 했다.
일본, 대만에서 들여온 황금편백 등 희귀 수목들이 지천으로 펼쳐져 눈이 부신 소록도 중앙공원은 강제 동원된 한센인들의 눈물이었고, 거의 모든 한센인들이 단종 수술의 참담함을 피해 갈 수 없었다.
1962년 소록도 한센인들이 정착촌을 짓겠다는 집념으로 벌인 간척공사를 수탈당한 오마도 사건은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고난과 핍박으로 점철된 소록도가 2016년 개원 100주년을 맞아 국내 한센병의 역사를 보여 주는 교육의 장으로 탈바꿈한다.
이를 위해 소록도병원은 지난해 11월 국가기록원과 ‘한센 100년 역사 기념사업 추진을 위한 협약’을 체결, 역사 정리 작업의 첫 발을 뗐다.
소록도 100년사는 기록물 보존, 관리에 대해 국가기록원의 전문적인 지원을 받아 체계적인 사료 정리 및 훼손 위기의 자료 복원이 이뤄진다.
소록도병원은 현재 ‘100주년 기념사업 태스크포스(TF)팀’을 꾸리고 소록도 100년사 편찬과 개원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에 여념이 없다.
TF팀은 소록도의 100년 역사를 오롯이 담아내기 위해 전국 91개 한센인 정착촌을 돌며 옛 자료들을 수집하고, 다른 지역의 박물관이나 전시관 등에 대한 벤치마킹을 통해 100주년 기념사업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특히 일본 및 국내외 대학 도서관 등에 소록도 관련 자료가 상당수 산재해 있을 것으로 보고 올 하반기 TF팀을 100년사 추진단으로 확대 개편, 자료 수집에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100주년 TF팀 김병욱 주무관은 “고난과 핍박으로 점철된 한센인 100년의 삶을 담기 위해 자료 수집부터 세심한 관심을 쏟고 있다”며 “국내 한센인 정착촌과 도서관, 일본 등 국내외에 방대하게 분포한 자료수집에 중점을 둘 계획이며, 한센인들의 집을 방문해 생활 물품 등도 적극 수집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소록도에는 현재 병원 규율을 어긴 한센인들을 가뒀던 감금실과 남성 한센인들을 강제로 거세했던 단종대 등이 남아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소록도병원의 모태인 자혜의원과 한센인 죄수를 가뒀던 순천교도소 소록도지소 등도 한센인의 아픔을 간직한 시설들이다.
또 일제강점기 때의 ‘소록도갱생원 연보’, ‘국립소록도병원 운영규정’ 등 한센인과 관련된 도서와 문서·도면·사진 등 1만여 점이 있다. 한센인들의 생활용품과 의료기기·사진 등 1,315점은 개원 80주년을 기념해 지난 1996년 문을 연 전시실에서 볼 수 있다.
앞서 소록도병원은 100주년을 기념, 한센인의 아픈 역사와 애환을 담은 구술사료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지난해 3월 완료된 1차 구술사료집 ‘또 하나의 고향 우리들의 풍경’에는 소록도에서 40년 이상 거주한 입원환자 19명과 평균 23년 이상 병원에서 근무하고 퇴임한 직원 등 총 26명의 구술을 수록했다.
이어 지난해 말 완료된 2차 구술집에는 소록도에서 살다가 전국 91개 정착촌으로 나가 생활터전을 개척했거나, 사회로 복귀한 한센인들의 삶을 다뤘다.
2차 구술집에는 자신의 삶을 기억하는 한센인들이 생을 마감하기 전에 그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낱낱이 담아냈다.
박형철 소록도병원 원장은 “소록도병원은 국내 한센인의 100년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며 “100주년 기념사업을 통해 소록도가 치료기관만의 역할이 아닌 소통하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만들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아름다운 동행
100주년 역사 편찬과 더불어 소록도병원에는 올 봄 길이 110m, 높이 1~3m의 초대형 벽화가 등장한다.
고흥 남포미술관 기획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추진하는 ‘아름다운 동행-소록도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소록도 옹벽 벽화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오랜 세월, 편견과 오해로 마음 한켠 응어리를 간직한 채 살아온 소록도 사람들의 아픔을 달래주고 뭍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져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획된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젝트는 한센인들이 강제로 격리된 뒤 차별과 핍박을 받았던 과거, 소록도 사람들의 복지와 인권을 위해 힘써온 이들과 환자들의 모습을 그려 넣은 현재, 희망과 생명의 소중함을 형상화한 미래 등 세 구간으로 나뉘어 제작된다.
남포미술관은 지난해 11월부터 대형 벽화에 새겨질 소록도 주민, 병원 의사 간호사, 자원봉사자 560명의 얼굴을 촬영해 돌조각 밑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벽화 전면에는 이렇게 만들어진 가로 30㎝, 세로 40㎝ 규모의 돌판 타일 1,000여장이 들어갈 것으로 추산된다. 아기 사슴을 닮았다는 소록도의 지형, 한센인의 감금·단종·노역을 대신 표현한 사슴의 형상도 곁들인다. 주민들도 직접 타일을 박거나 색칠하며 동참한다.
남포미술관은 작품 제작이 완료되면 소록도병원 개원일(5월17일)에 맞춰 작품을 공개할 계획이다.
벽화 작업에는 조각가 박대조씨를 비롯, 이영지(한국화), 김병진·강득봉·이경재·박민정·변숙경(이상 조각), 오영수·박서윤·오기근(이상 서양화) 등 10명의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제작비는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으로 모았다.
곽형수 남포미술관장은 “한센인들을 세상과 이어주고, 희망을 심어주는 작품을 만들겠다”며 “외로운 한센인들이 벽화 프로젝트를 통해 위안을 받고 치유의 활력을 얻었으면 한다”고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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