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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멀구슬나무 꽃향기 타고 여름이 온다

김명화 작가·교육학 박사
연보라빛 꽃·향기도 매혹적
정원탐방 기간 공감각의 기억

2024년 06월 10일(월) 18:50
밤 산책을 하였다. 바람결에 향긋한 꽃향기가 날아온다. 무슨 향기일까? 라일락, 아카시아도 지고, 오동나무꽃 향기인가 하고 주변 나무를 살펴보니 오동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밤 산책에서 만난 아름다운 향기를 품어내는 나무를 찾을 수 없어 그냥 걸었다.

녹음이 짙어지는 계절에 해남에 있는 정원을 찾아갔다. 강진과 가까운 계곡면에 있는 민간정원으로 들어선 순간 밤 산책에서 만난 꽃향기를 만났다. 밤 산책길에 만난 나무는 이맘때쯤 길가는 나그네를 향기로 사로잡는 멀구슬나무였다. 멀구슬나무는 갈 봄 여름 없는 계절에 나뭇가지 끝에 연보라 꽃이 피어 어두운 밤에는 꽃이 보이지 않아 무심코 지나가면 라일락 향기인가? 하면서 그냥 지나치기 쉬운 나무다.

다산 정약용의 '농가의 늦봄' 시의 일부분이다. '비 개인 방죽에/ 서늘한 기운 몰려오고/ 멀구슬나무 꽃바람 잦아들자/ 해가 점점 길어지네./ 보리이삭 밤사이 부쩍 자라서/ 들 언덕에 초록빛이 무색해졌네.' 시를 보더라도 정약용은 자연의 섭리를 잘 관찰한 것 같다. 이맘때면 남도는 보리가 익어가는 시기다. 해남 가는 길에 들판은 밀과 보리가 초록의 잎을 비켜내고 하오 7시가 되어도 들녘이 환하다. 멀구슬나무를 보면서 엊그제 저녁 산책길에 아름다운 꽃향기를 가진 멀구슬나무에 대해서 알아본다.

멀구슬나무는 멀, 구슬, 나무의 합성어다. 문헌에 의하면, '제주 방언 '말쿠실낭' 에서 나온 언어로 말은 말(馬), 말쿠실은 노랗게 익은 열매 구슬이며, 낭은 나무란 뜻이다. 말쿠실은 말방울이니, 열매가 말방울처럼 생긴 나무란 이름이다. 옛 문헌에 나오는 멀구슬나무 열매 금령자(金鈴子)도 금빛 나는 방울을 의미'라고 우리 나무의 세계에서 기록을 보더라도 멀구슬나무는 꽃보다는 노란 열매를 딴 이름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창 교촌리에 있는 멀구슬나무는 200년쯤 되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로 2009년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고창군청 앞 도로에 있어 누구나 쉽게 편안하게 쉬어가지만, 멀구슬나무로서는 가장 북쪽에 자라난 나무라는 점에서 보존가치가 높은 나무다. 멀구슬나무의 특징은 꽃향기에 있다. 보랏빛 다섯 개의 꽃잎은 안쪽에는 진보라, 밖에는 연보라빛이 감도는 꽃으로 향기가 매혹적이다. 남도 해안가에서 따뜻한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꽃으로 열매를 보면 노란 콩을 닮았다. 그렇다면 다산 정약용의 '농가의 늦봄' 시는 강진 다산초당에서 쓴 시라고 볼 수 있다. 이 열매로 불가에서는 염주를 만들기도 하고 열매를 구충제, 방부제로 사용했다고 한다. 멀구슬나무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자라온 나무이지만 남부지방에서만 자라 중부지방에서는 생소해 이름도 보랏빛 꽃도 낯선 나무일 것이다.

얼마 전이었다. 가끔 만나 삶의 지혜를 얻고 있는 P교수는 "배꽃과 감꽃은 지는 때가 다르다."는 이야기를 했다. 최근 지인이 부모님 상을 당하여 크게 상심하며 힘들어하자 이별, 죽음을 빗대어 한 이야기다. 배꽃은 이른 봄에 피고 지고, 감꽃은 좀 더 늦은 시기에 피어 있다가 지는데, 감꽃이 배꽃 지는 것을 슬퍼하지 않듯이 저마다 때를 맞아 겪는 일에 큰 낙담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렇다. 모든 자연물은 저마다 때가 있다. 그게 바로 자연의 섭리라는 것이다. 5월 하순 꽃이 지고 있는 시기에 멀구슬나무 꽃바람을 맡으며 그늘에서 잠시 쉬어본다.

이번 정원 탐방에 만나게 된 멀구슬나무는 공감각의 기억을 남겼다. 정원에 들어설 때 향기로 만나고, 두 번째 창가에 앉아 눈으로 보랏빛 꽃을 보며, 세 번째는 정원을 산책하면서 바람결에 멀구슬나무 꽃향기 타고 산들바람을 만나본다. 아카시아, 찔레꽃이 진 들녘에 멀구슬나무 꽃향기 타고 여름이 오고 있다. 멀구슬나무가 보이는 민간정원 카페 창가에 앉아 보랏빛 꽃이 바람결에 흔들거리는 모습을 바라본다. 여기에서 멀지 않는 강진 다산초당에 머물렀던 정약용도 다산초당 천일각에서 보리밭을 바라보며 멀구슬나무 향기를 맡았을 것이다.

멀구슬나무 산들바람에 흔들거리는 꽃을 바라보며 꽃향기를 맡는다. 해남 민간정원에서 만난 멀구슬나무꽃 이야기를 하다 보니 노을이 해남 흑석산에 길게 드러누웠다. 갈 봄 없는 계절에 잔잔한 바람결에 꽃향기 타고 여름이 서서히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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