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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범벅된 광주…계엄군 잔혹한 살생 결코 잊을 수 없어"

[오월 그날, 못다한 이야기] ②김준봉 항쟁 지도부 조사부장
5·18 시민군 최연소 간부로 참여
북한 소행 자작극 ‘독침사건’ 조사
죽음보다 힘겨운 고문에 트라우마
상무대서 김대중 내란음모죄 엮어

2024년 05월 20일(월) 18:49
김준봉씨가 80년 5월 당시와 505보안부대 등 고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있다. /이수민 기자
“내란죄로 조작하기 위해 가혹한 구타와 고문을 일삼았어요. 계엄군에 고문당한 걸 생각하니 아직도 군인과 경찰을 보면 치가 떨리고 화가 나네요.”

5·18민주화운동 최후 항쟁지인 옛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505보안부대로 끌려간 김준봉씨(65)는 시민군 간부였다는 이유로 모진 고문을 받아야했다. 당시 나이 21살 고려시멘트 직원이었던 김씨는 1980년 5월 27일 새벽까지 민주시민투쟁위원회(시민군) 조사부장을 맡은 시민군 최연소 간부였다.

김씨는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이뤄진 참혹한 광경을 회상하며 5·18 시민군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그는 “21일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에 총을 맞은 중학생이 피를 철철 흘리며 몸을 숨기기 위해 회사 앞으로 찾아왔다”며 “중학생을 업고 옛 적십자병원으로 향했지만, 병원에도 피가 모자란다고 하더라. 계엄군이 광주에서 저지른 만행에 시민군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어 북한 소행 등 간첩사건으로 조작된 ‘전남도청 독침사건’의 기억을 떠올리며, 계엄사 측에서 투입한 프락치들의 소행이었다고 강조했다.

시민군 조사부에서 경찰 역할을 맡은 김씨는 5월 24일 오후 자칭 정보부라고 칭한 장계범·정한규가 무전기를 통해 계엄사와 작전을 모의하는 것을 발견했다.

다음날인 25일 오전 8시께 장계범이 독침에 맞는 사건이 발생했고, 상처 부위를 입으로 빨아낸 정한규는 전남대병원 응급실로 이송됐다.

김씨는 도청 시민군 회의에 독침사건을 보고하고 조사를 위해 전남대병원으로 갔지만, 장계범과 정한규는 이미 도주한 뒤였다.

광주를 벗어나던 정한규는 수색에 나선 시민군에 붙잡혔고, 장계범은 광주를 벗어나 도주에 성공했다. 정한규 진술에 의하면 장계범과 함께 23일 오후부터 도청 안에서 만난 한 여자를 통해 지속적으로 바깥과의 연락을 취했고, 시민군의 무전기로 도청 내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계엄군에게 보고했던 첩자였다.

27일 자정이 넘어가면서 광주시내로 계엄군이 진입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김씨는 조사부에 보관했던 총과 탄약을 챙겨 도청 후문으로 향했다. 27일 오전 4시께 157명의 시민군이 지키던 도청을 향해 3공수여단 등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이 시작됐다. 도청 후문을 넘어 최후 항쟁을 결의하고 남아 있는 시민군에 무차별 총격이 가해지면서 후문을 지키던 김씨는 계엄군에 체포됐다.

김씨는 “경상도 출신으로 추정된 장교(대위)가 ‘마 니는 사라?다 운 억수로 좋네’라며 계속 이야기를 했다”며 “계엄군들이 등에 ‘극렬분자 총기 휴대’라는 글을 적었다”고 설명했다.

계엄군에게 붙잡혀 끌려가던 김씨는 도청 후문 철제문과 건물 사이 2m 좁은 공간에서 시민군 2명이 쓰러져 있는 것을 목격했다.

한 명은 이미 온몸이 피범벅이 된 채 사망했고, 복부에 총을 맞은 다른 한 명은 온 힘을 다해 “어머니”를 부르다 현장에서 숨을 거뒀다.

그는 “당시 도청 건물 안에서부터 질질 끌려 나와 계속 군홧발로 짓이김을 당하고 있어 ‘항쟁 동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고 눈물을 흘렸다.

김씨는 체포된 5월 27일부터 7월 30일까지 505보안부대와 상무대에서 각종 고문과 온갖 폭력을 당했다. 그는 6월 19일까지 505보안부대에서 물고문, 같은 질문 계속하기, 두들겨 패기, 비행기 태우기, 거꾸로 매달기, 잠 안 재우기 등 각종 고문을 받았고, 그때까지만 해도 집회·시위로 인한 소요죄 적용을 받았다.

그러나 6월 20일 상무대 영창으로 오면서 수경사 헌병단 신재호 수사관의 수사가 시작됐고,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내란음모죄로 엮이기 시작했다.

김씨는 “수사관들이 매일매일 똑같은 질문과 석봉으로 폭행을 당했다”며 “더이상 고문과 심문을 버틸 수 없어 수사관의 멱살을 잡고 그만 때리고 죽이라고 화를 냈다”고 말했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던 그는 체포 5개월 만에 내란중요임무종사죄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됐지만, 1981년 4월 3일 이희승 계엄사령관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5개월간 무차별적인 구타와 고문의 결과는 심각했다. 20대부터 허리부상·어깨탈골·역류성 위 통증·분노조절장애 등을 앓았고 5월을 생각하면 악몽을 꾸는 고문 후유증마저 겪고 있다.

김씨는 “함께 고문받은 동지들이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않아 약을 제때 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트라우마를 못 견디고 알코올에 의존하거나 정신질환을 앓는 등 심지어 극단적 선택을 한다”며 ‘살아남은 자’로서의 아픔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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