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에서 철 지난 계절 떨이하듯 신발을 싸게 팔고 있다. 때 마침 과속으로 치닫는 걸음을 지탱해 온 구두는 낡아 있다. 신발끈을 묶지 않고 조였다 푸는 방식의 신발이 눈에 띈다. 유행을 팔기 위해 하고픈 말이 많아 보이는 신발이 반짝반짝 빛난다. 신어 보니 엄청 편하다.

“이 소가죽 스니커즈는 양복에도 잘 어울려요.”

직원이 말하는 생소한 단어 ‘스니커즈’가 귓바퀴에서 뒤집혀 떨떠름히 걸려 있다.

“밑창이 고무로 된 운동화를 스니커즈라 해요. 양복과 청바지 둘 다 어울려서 인기가 좋아요.”

난생 처음으로 양복에 맞춰 신기 위해 스니커즈를 산다.

그러고 보니 사람도 점잖은 정장 구두 같은 사람이 있고 경쾌한 스니커즈 같은 사람이 있다. 구두를 신으면 신사의 품격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실밥이 너덜거리는 우스갯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뒤축이 잘근잘근 접히듯 실없는 행동을 해서도 안 된다. 그런 점에서 고향의 한 선배는 점잖은 정장 구두를 닮았다. 선배는 늘 남자답게 리더로서 행동했다. 함부로 구두 코를 치켜들 듯 언성 높이며 말다툼하지도 않았다. 반짝반짝 광을 낸 구두처럼 무게감으로 상대방을 압도했다. 나는 그런 근엄한 선배가 멋져 보였다.

하지만 직장에서 은퇴한 후 선배는 힘들어했다. 남자는 집안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구시대의 사고방식 때문에 아내와 충돌이 잦았다. 지시어와 명령어 같은 구두를 벗어야 하는데 여전히 신고 있었다. 한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어진 뒷굽처럼 자신의 틀만 고집했다. 사사건건 부딪치며 노년의 뒷굽은 닳아져 갔다. 구두 속에 갇힌 구겨진 하룻길이 자꾸만 삐거덕거렸다.

가죽 스니커즈는 구두에 비해서는 투박하지만 운동화의 효용성을 지니고 있어, 양복과 청바지에 모두 다 신을 수 있다. 그 무엇과도 조화롭게 어울리는 유연성이 있다. 스니커즈는 예고도 없이 어긋난 길들이 몰아쳐도 캄캄하게 아픔을 갉아먹지는 않는다. 불길한 내일의 급류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도 않는다. 구두는 양복을 입지 않을 때는 신발장 구석에 놓여 있지만, 스니커즈는 다르다. 양복에서 곧장 청바지로 바꿔 입고 막일을 해도 스니커즈는 괜찮다. 함부로 할퀴고 찌르는 삶의 무표정을 견딜 만큼 스니커즈는 맷집이 있다. 불안이 팽창하는 발자국의 흉터 속에서도 끝끝내 험한 일을 극복한다.

선배는 아내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아침밥만 먹으면 할 일이 없어도 밖으로 나갔다. 신경이 예민해진 대낮의 비위를 맞추며 사라진 지난날의 발자국을 안주 삼아 오후를 마시곤 했다. 발자국을 게워낸 오후가 바닥나서야 기울기가 삐딱한 골목을 끌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대응하는 스니커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스니커즈라면 방황으로 뒤엉킨 길들이 꼬여 덜거덕거려도 경쾌하게 걸을 것 같다. 직선의 길이 방치되어 휘어짐 많은 곡선으로 읽혀지더라도 심하게 휘청거리지는 않을 것 같다. 한 가지 방식만 고집하며 헛된 꿈에 부푼 점령군 같은 구두를 뒤로하고 스니커즈를 신는다. 생의 가뭄이 와도 견딜 수 있게 신발끈 바짝 조인 뒤 백화점을 나선다. 저벅저벅, 거리를 목청껏 낭독하는 소리가 경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