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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박덕은 문학박사·화가·전 전남대 교수

2022년 05월 18일(수) 09:58
벚꽃이 화사하다. 회색빛의 깡마른 벚나무의 몸 어디에서 봄날이 시작되는 걸까. 무단횡단하듯 봄의 건널목을 건너는 저 꽃빛에 홀려 발걸음을 멈춘다.

수년 전 그때도 이즈음이었을 것이다. 옥상 텃밭에서 물을 주고 있는데, 벚나무 가지에서 폭죽처럼 팡팡 터지는 벚꽃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기를 급히 챙겨 들고 공원으로 나갔다. 벚꽃은 봄날을 짧고 강렬한 몰입으로 그려내는 크로키 화가와 같아서 붓을 내려놓기 전에 서둘러 셔터를 눌러야 했다. 그 짧은 벚꽃의 연분홍 손놀림을 수없이 렌즈에 담았다. 줌으로 꽃빛을 끌어당겨 화가의 감정까지 담아냈다. 어둠이 에워싸 더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되자 집으로 향했다. 대문을 열려고 주머니를 뒤졌는데 열쇠가 없었다. 사진 찍을 때 빠뜨렸는가 싶어 공원 구석구석을 살펴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열쇠를 어디에 두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나의 뇌는 기억이 방전된 배터리와 같아서,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열쇠에 관한 기억은 충전되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 얼떨떨한 빈몸으로 공원과 골목길을 한참동안 서성여야 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 할머니가 우왕좌왕하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가방 속에서 열쇠 뭉치를 꺼내 건네주었다.

“이 중에 맞는 게 있나 찾아 봐요.”

나는 고맙다며 받아든 열쇠로 이것 저것 열어 보았다. 어느 순간, 철컥 소리가 나더니, 대문이 스르르 열렸다.

우리집 대문은 나를 향해 항상 열려 있다고 생각했는데, 열쇠가 없으면 문은 그 순간 벽이 된다. 대문만 그런 게 아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타인의 마음문을 여는 열쇠가 없을 경우, 문은 인정사정없이 나를 거부한다.

고교 시절 한 친구의 잘못을 다른 친구들 앞에서 지적한 일이 있었다. 잘못을 지적해 주는 열쇠가 있으면, 그 친구의 마음문이 열리고 반성할 줄 알았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친구의 마음문은 더 굳게 닫혀 단단한 벽이 되어 버렸다. 친구들이 가지고 있었던 공감과 배려라는 열쇠를 그 당시 나는 갖고 있지 않았다.

사는 동안 그처럼 짝이 안 맞는 열쇠로 타인의 마음문을 열기 위해 꽂아 보고 비틀어 보다 돌아섰던 적도 많았다. 어떤 날은 나를 향해 열려 있는 마음문을 의심하며 잃어버린 열쇠를 찾는다는 핑계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또 어떤 날은 아집과 편견의 열쇠로 마음문을 열다가 열리지 않는 문을 비난하고 공격한 적도 있었다.

지난겨울 벚나무는 봄을 여는 열쇠가 없어 봄의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찬바람에 오돌오돌 떨었을 것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열쇠를 찾다 지쳐 잠들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벚나무에서 봄의 문이 서서히 열리고 열린 문 틈새로 연분홍 꽃빛은 조금씩 차올랐을 것이다. 봄의 문이 열리는 그 환희의 소리처럼 닫혀 있던 마음문이 나를 향해 스르르 열리는 날을 만나고 싶다. 혹독한 겨울의 아픔 속에서도 성급함을 내려놓고 인내했던 벚나무의 시간처럼 나도 조바심을 내려놓고 기다릴 수 있을까.

벚나무 가지마다 봄을 여는 열쇠, 그 꽃잎들이 화사하게 걸려 있다. 봄바람이 열쇠를 흔들고 가는지 짤랑짤랑 소리 물고 꽃잎들이 날린다. 떨어진 꽃잎을 줍는다. 마음문도 열 수 있다는 듯 연분홍 꽃빛이 참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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