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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섬’ 빛나는 해양문화 유산 (근대역사문화 part.1)
2021년 02월 03일(수) 10:03
비금농협 전후
‘천사의 섬’ 빛나는 해양문화 유산 (근대역사문화 part.1)

등록 문화재 800여건 원형 보존
일제강점기 축조된 군사시설 산재
섬마을 사회공동체 정신 천일염전
‘돌담’ 토속적 한국미와 정서 간직

글 신안=이주열 기자 사진 신안군 서대승 제공

신안군은 한국 해양문화의 상징으로 문화유산 또한 찬란하다. 1,004개나 되는 많은 섬과 넓은 바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선사시대 고인돌과 진귀한 패총을 비롯해 고대 국제해양 항로로서의 요충지였음을 입증하는 산성 유적 등은 학술적 가치가 높다. 섬사람들 삶의 형태를 보여주는 민속유적과 유배문화도 깊다. 불의에 저항하고 부당과 치열하게 싸웠던 항일운동과 농민운동의 근·현대 역사도 산재한다. 아팠던 지난날이지만 기억해야 할 과거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되짚고 자세히 들여다볼 때다. 그다지 멀지 않은 앞선 날들인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를 거친 근대문화유산에 대해 살펴본다.

▲800여건의 근대문화유산

문화재는 역사가 깊은 궁궐과 사찰, 석탑, 유적 등 유·무형의 문화재를 일컫는다. 역사가 오래되지도 않았고 건물 자체의 문화재적 특성도 높지 않은 건조물과 서양식, 일본식 건물들도 문화재 지정·등록되는 예외도 있다.
근대문화유산으로도 불리는 등록문화재는 조선의 쇠락과 함께 시작된 개항(1876년)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남겨진 역사문화자원에 대한 보호 차원에서 도입됐다. 2001년 만들어진 등록문화재 제도는 근대기 문화유산이 산업화·도시화에 의해 급격하게 멸실·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현재까지 800여건의 문화재들이 등록돼 원형을 보존하면서 종교시설과 교육기관, 식당, 박물관, 생산시설 등으로 활용 중이다.
등록문화재는 건설·제작·형성된 후 50년 이상이 경과한 것으로, 역사·문화·예술·사회·경제·종교·생활 등 각 분야에서 기념이 되거나 상징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지역의 역사·문화적 배경이 되고 그 가치가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것도 포함된다. 기술발전과 예술적 사조 등 시대를 반영하고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규정한다. 긴급한 보호조치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유물도 대상이다. 건설 후 50년 이상이 경과하지 않더라도 등록문화재로 등록할 수는 있다.

▲희노애락 함께 한 신안군 근대 유산

섬과 바다로 이뤄진 신안군 곳곳에는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기 위해 돌을 쌓아 올린 담장이 흔하다. 섬마을 곳곳에 잘 남아 있는 돌담은 마을의 역사와 함께 했다. 오랜 세월을 이어온 신안 고유의 문화로 전통미가 으뜸이다. 섬사람들과 희노애락을 함께 한 소중하고 귀한 자원이다.
지난 2006년 12월 흑산도 사리마을 옛 담장과 (등록문화재 제282호) 비금도 내촌마을 옛 담장(등록문화재 제283호)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돌담이 마치 성벽 같은 형태를 띠고 있는 우이도의 돌담도 압권이다. 총 30여m 길이의 돌담이 잘 보존돼 있다. 돌담은 두 개의 직선을 이루며 바깥 담의 길이가 14m, 안쪽 담은 26m로 높이는 1.7m 가량이다.
단일염전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증도 태평염전과 석조 소금창고는 2007년 11월(등록문화재 제360호), (등록문화재 제361호) 각각 지정됐다. 태평염전은 1953년 한국전쟁 피난민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조성됐다. 같은 해 건축된 석조 소금창고는 원형 그대로를 유지하고 내부를 리모델링해 지난 2007년 소금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박물관 내부에는 소금의 역사와 문화, 미네랄, 천일염전 구조와 함께 소금의 경제사·사회사·신화 등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전시 중이다.
광복 이듬해 주민들이 주도해 만든 비금도 대동염전 (등록문화재 제362호)도 2007년 등록됐다.
1907년 무인등대로 처음 불을 밝힌 후 1935년 유인등대로 증축한 가거도 등대(등록문화재 재380호)는 20세기 초 설치된 근대기 등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등대 건축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흑산도 천주교 본당인 진리 흑산성당은 1958년 건물로 2019년 8월 등록문화재 제795호로 등록됐다.
일제강점기 유적으로는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해상권 장악을 위해 조성된 비금 선왕산 해안포진지 (비금면 내월리)와 옥도 해군기지터 (하의면 옥도리)가 대표적이다. 해군기지터에는 1936년 조성한 ‘팔구포해군정’ 우물과 ‘대일본제국해군용지’ 경계석, 일본해군 석조목욕시설 등이 남아 있다. 1904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기상관측소 터인 기상대터도 옥도에 현존한다.
천연기념물 제332호로 지정된 칠발도
천연기념물 제332호로 지정된 칠발도에는 1905년 서남해상 최대 규모로 설치한 유인등대가 1990년대 중반까지 운영되다가 무인등대로 전환됐다. 러일전쟁 이후 패망까지 일본의 서남해 해상권 장악을 위해 전략적으로 사용된 홍도 등대(천연기념물 제170호)는 1931년에 세워졌다. 가거도 등대는 등록문화재 제380호로 1907년 조선총독부 체신국 흑산도 등대로 점등했다.

◇일제강점기 유적

▲‘신안군 최초의 교회’덕산교회 놋종

신안군 최초 교회 놋종
신안군 최초의 교회로 총회 사적 제39호인 비금 덕산교회의 놋종은 1920~30년대에 제작됐다. 덕산교회 4대 권역자였던 김봉현 조사(1920년대 시무) 때 종을 구입한 것으로 짐작된다. 덕산교회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목포 양동교회 종소리에 은혜를 받은 김봉현 조사의 동생 김봉신이 3년간 점심을 금식하면서 모은 양식을 팔아 평영에서 종을 구입했다. 종 외부 표면에는 십자가 표시가 선명하고 그 아래에 ‘관서로종’이라고 한글 글씨가 선명하다.
일반적으로 종 내·외부 표면에는 종 제작사와 제작 연도 또는 종의 용도와 기증자 등을 부조 형태로 새겨 표시한다. ‘관서로’라는 명칭은 예로부터 ‘서북로’라고 해서 평안도 일대를 지칭했다. 평양과 인근 지역에 있었던 종이었거나 종 제작사 이름으로 추정되는 이유다.
덕산교회의 종은 기계적 특징도 독특하다. 타종을 위한 종 줄을 도르래 바퀴 대신 막대장치에 연결하고 있다. 대부분의 교회 종이 도르래 장치로 프레임에 고정된 종을 움직여 매달린 추를 대타해 소리를 내는 방식과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교회 종에서는 볼 수 없는 제작 기법이다. 교회 기록과 교인들의 증언, 실물의 특징을 종합적으로 검토해볼 때 평양 또는 북한지역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덕산교회 황규석 목사는 “지금까지 발굴된 옛 교회 종 가운데 북한지역에서 제작된 것으로는 국내에서 유일하다”며 “현존하는 대부분의 옛 교회 종이 철종임에 비해 주물된 놋종이라는 희소성 때문에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교회 놋종은 일제강점기에 공출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교인들의 노력으로 지켜냈다. 현재도 예배의 시작과 끝을 알릴 정도로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으로 철종과 달리 소리가 상당히 부드럽다.

▲금융 조합 시설-비금농협창고

비금면 수도마을에서 수대선착장으로 향하는 도로변에 있는 창고 건물은 현 비금농협의 전신이다. 뭍에서 들어오는 배들이 닿는 가까운 지금의 수대선착장에 지어졌다. 1936년 축조된 건물로 사무실과 창고, 소장 사택으로 이뤄진 일제강점기 금융시설이다. 당시 농업은행으로 신용업무를 취급했고, 목포 소재 신안군조합에서 파견된 이들이 근무했다.
1940년대에 비금면과 도초면, 흑산면을 관할했다. 현재의 농협과 같은 기능을 담당했다. 1945년 광복 이후 1960년대까지 유지한 끝에 1972년 비금농협 서부분소로 거듭났다.
1976년부터 3년 동안 비금농협 서부지소에 근무했던 차승일 현 도초농협 상무는 “1969년부터 지역별로 회원농협들이 속속 들어섰고, 1972년 비로소 비금농협 서부분소로 출발해 신용과 경제업무 취급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차 상무는 “당시 사무실과 숙직실, 창고, 관사 등 4개의 일본식 건축물이 있었으나 지금의 창고를 제외하고는 모두 철거됐다”며 “목포 소재 신안군조합에서 파견된 지소장과 직원 2명이 근무했다”고 밝혔다.
창고 건물은 1930~40년대 목조건축의 특징적 양식인 트러스 구조가 잘 남아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 강형열의 사유재산이 된 이후 내부공간을 변경해 현재 개인 주택과 창고로 사용 중이다.

▲군사시설 조사·연구‘절실’

신안군 최초 교회 놋종
비금도 선왕산 일대에는 일제강점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군사시설이 곳곳에 존재한다. 선왕산 정상과 능선을 따라 설치된 참호와 포진지가 대표적이다.
유적은 내월리 월포마을과 내촌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 지맥에 10기가 산발적으로 위치한다. 대부분의 시설이 바닷가를 등지고 마을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산 정상부 또는 중턱의 바위산을 ‘ㄴ’자로 굴착해 바닥을 평편하게 한 후 석재를 이용해 담을 쌓았다. 시설 규모는 둘레 20~30m, 높이 2~3m 정도다.
마을을 향해 포문을 개방했으며, 내부에는 석축 또는 시멘트로 된 ‘회(回)’자 형 시설이 관찰된다. 포를 지지하기 위한 시설로 추정된다.
군사시설은 일제강점기에 중국으로 가는 항로를 장악하기 위한 목적의 포대시설과 주변 섬을 관방하기 위한 관측시설이 공존하고 있다. 비금ㆍ도초 주민들이 징용돼 시설을 축조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군이 퇴각할 때 고의로 파괴했다고 전해지며, 마을 안쪽에 병참무소와 발전소가 있었으나 모두 파괴됐다.
현재는 천연기념물 제332호로 지정된 칠발도에는 1905년 서남해상 최대 규모로 설치한 유인등대가 1990년대 중반까지 운영되다가 무인등대로 전환됐다. 서남해안 일대의 여러 섬들에는 1904년 러ㆍ일전쟁 이후 일본의 전략적인 필요에 의해 해상권 장악을 위한 해군기지, 포진지, 참호시설 등이 잇따라 구축됐다.
선왕산 일대는 비금 칠발도 앞바다를 지나 고군산군도 등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려는 해상활동을 감시하고 저지하기에 최적의 요충지였다. 일제 초기부터 군사 관련 시설들이 속속 들어선 이유다. 현재 선왕산 정상과 능선에 분포한 5개의 참호와 포진지 시설은 그 흔적이 온전하다. 하누넘해수욕장 안쪽과 내월리 일대에는 일본 해군 주둔지와 탄약고 터 등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
이밖에 일제는 자은면과 서남해 해로의 요충지인 하의도 옥도에 해군기지를 조성됐다. 1936년 조성한 ‘팔구포해군정’ 우물과 ‘대일본제국해군용지’ 경계석, 일본해군 석조목욕시설 등이 그대로다. 신안지역 여러 섬들에는 해군기지와 해군주둔지, 포대시설, 해군 우물터 등 일제강점기 군사시설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보다 구체적인 조사와 연구가 요구된다.

▲공동체 정신 빛난 대동염전

비금 대동염전
광복 후 섬에서 한국인에 의해 최초로 천일염 생산에 성공한 곳이다. 평양에서 염전기술을 습득하고 고향에 돌아온 박삼만(朴三萬 1920~1978)과 그의 기술을 바탕으로 천일 염전조성을 주도한 손봉훈(孫鳳勳 1915~1994)이 주도했다. 이들은 마을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을 모아 조합을 구성하고, 염전 개발을 추진했다.
2007년 등록문화재 제362호로 지정된 대동염전은 떡메산을 배경으로 규모와 인문적 경관이 뛰어나다. 섬마을 사람들의 공동체 정신을 보여주는 근대문화유산이며, 천일염전의 역사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유적이다. 바닷물을 끌어 올려 하늘과 바람, 염부의 정성이 모여 소금꽃을 피운다. 대동염전은 광복 후 1946년에 수림리에 1호 염전이 조성된 후 비금도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만든 대규모 염전이다.
조합원으로 참여한 주민만 450명이고 자금뿐만 아니라 야산에서 돌을 이어 날라 바다를 손으로 메꾸는 공동노동에 참여해 만든 대역사다. 초창기 염부가 150명, 보충염부 50명으로 한 작업에서 15일 이내에 소금을 만들었다.
당시 비금중앙초등학교에 ‘천일염전기술자양성소’가 설치돼 젊은이들이 염전기술자로 양성됐고 이들을 중심으로 ‘수림 염전개발기술조합’이 결성됐다. 이후 기술자들은 인근 도서지역과 완도군, 해남, 무안, 영광, 고창, 부안, 군산 등지로 진출해 천일염전 조성공사에 참여해 해방 후 국내 염전발전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동염전은 국내에 남아 있는 다른 대규모 염전이 한국 전쟁기에 국가 정책적 측면에서 조성된 것에 반해 섬 주민들이 스스로 개척했다는 점이 남다르다. 특정 마을이 아닌 섬 전체지역 주민들이 뜻을 모았고, 지금도 주민들 소유로 직접 운영되고 있어 의미가 크다. 현재 대동염전과 연계한 체험 교육장 조성사업이 추진 중으로, 관광자원으로서의 활용 가치도 높다.

▲토속미 넘치는 내촌마을 담장

비금도 내촌마을돌담
돌담은 마을의 역사와 더불어 수 없는 세월을 이어온 문화유산이다. 토속적인 한국미와 정서를 간직하고 있다.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막 쌓은 듯 보이지만 여느 골목길과는 또 다르게 넘쳐나는 아늑함과 여유가 있다.
사람과 자연을 구분하거나 경계를 지우기도 하는 소통의 공간 ‘돌담’이다. 섬마을 전통문화가 고스란히 보존돼 있는 곳으로, 바닷바람과 액을 막는 우실과 함께 도서 해양문화의 대표적인 예다. 마을 전체가 돌담으로 둘러싸인 내촌마을 옛 담장은 등록문화재 제283호로 길이가 3,000m에 이른다. 지난 2016년 등록문화재 제233호인 흑산도 사리마을 옛 담장과 견줄만하다.
선왕산 능선 너머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피해를 줄이기 위해 집집마다 막돌을 쌓고 돌담을 이어나갔다. 담장의 돌의 형태는 둥글지 않고 길쭉하면서 날카롭다. 높이는 1.5m 내외로 고르고 가옥 부속 채가 담장역할을 하기도 했다. 막돌을 메쌓기하거나 막돌과 흙을 교대로 쌓아 올린 것, 시멘트 모르타르를 사용하는 등 여러 형식을 띤다. 1970년대 초 새마을운동 때 골목을 넓히면서 돌담을 물려 쌓는 등의 변화도 있었으나 주민들의 보존 의지로 현재를 유지하고 있다.
신안군은 선조들의 지혜로 켜켜이 쌓아 올린 돌담의 보존과 정비에 혼신을 쏟고 있다. 아름답고 쾌적한 지역환경을 조성하고 소중한 문화자원을 후세대에게 알리기 위함이다.
이재근 신안군 학예사는 “지역의 고유 문화자원인 돌담의 가치를 인식하고 개인과 마을의 공동자산인 돌담의 보존을 통해 마을 경관을 가꾸는데 정성을 다하고 있다”면서 “자긍심을 갖고 마을공동체의 회복을 도모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인터뷰-박우량 신안군수

“무한한 섬의 매력 디자인해 관광상품화”
‘1도 1뮤지엄’ 프로젝트로 감동ㆍ즐거움 선사

내촌마을 둘러보는 박우량 신안군수
“신안군은 1,004개의 섬, 곳곳에서 만들어진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 빛나는 지역입니다.”

박우량 신안군수는 “1976년 증도면 도덕도 앞바다에서 중국 송ㆍ원대의 진귀한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굴되면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며 “신안군이 고대 국제해양 항로로서의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고 말했다.
박 군수는 “인류 역사상 섬과 바다를 적극 활용할 줄 알았던 민족이 세계를 이끌어온 게 사실이다”며 “신안을 비롯한 도서지역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 ”고 강조했다.
특히 “신안군에는 선사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숱한 문화유산들이 보존되고 있다”면서 “역사적 가치를 정립하고 체계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 군수는 “우리 군민들은 섬에서 나고 자라면서 생활하는 특성상 다른 읍·면의 섬 문화와 유산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면서 “다양한 홍보를 통해 신안군 전체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선조들의 삶과 역사를 살펴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현재 섬 하나 하나에 박물관과 미술관을 건립하는 ‘1도(島) 1뮤지엄 프로젝트’를 완성해가고 있다”며 “빼어난 자연경관을 바탕으로 섬이 지닌 무한한 매력을 디자인하고 관광상품화해 속속 선보임으로써 사람들이 넘쳐 나는 지역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한편, 박 군수는 “1도 1뮤지엄 사업은 섬 주민들에게는 문화와 예술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고, 신안을 찾는 방문객들에게는 감동과 즐거움을 줄 것으로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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