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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원의 현대미술 에세이-질문과 대답<7> ‘예술의 종말’과 자유

시대적 소명 사라진 예술가 자유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
아서 단토, 앤디 워홀 ‘흰 브릴로 상자들’에 충격
모더니즘의 ‘예술을 위한 예술’은 종말 고해
예술가에게 부여되던 시대적 사명 의미 잃어

2020년 03월 26일(목) 09:38
1964년 노턴 사이먼 미술관에서 자신의 작품 ‘브릴로 박스(Brillo Box) 옆에 서 있는 앤디 워홀(Andy Warhol). 마켓의 브릴로 박스와 다를 바 없는 진열 방식, 외모로 보아 차이가 없는 그 모습이 예술의 종말 이론을 불러 일으켰다.
“때때로 그들은 내가 미쳤다고 말하지만, 광기는 최고의 예술이다.”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의 한 대목이다. 이 영화에서 고흐는 떠나는 고갱을 붙잡기 위해 자신의 귀를 자른다. 서로 원하는 바가 다른 두 예술가. 이후 고흐는 정신병원을 전전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그린다. 일반에게 알려진 고흐는 고독하고, 열정적인 예술가의 초상이다. 삶의 고통을 예술의 이유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피카소는 입체주의를 추구하면서 자신이 발견한 기본 질서를 덮어 감추는 것을 모두 폐기해버렸다.

“인상주의자들에 의해 회화에 도입된 색채, 정서, 감각 따위의 것을 입체주의자들이 포기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고 피카소는 프랑수아 질로에게 말했다. 외과의사가 시체를 해부하듯이, 대상의 형태를 분해하여 재구성하는 입체주의의 이념은 인상주의의 감각, 열정 등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미술은 화가가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방향대로 결정되며, 미술은 세상에 대한 철학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전환되었다. 더 이상 아름다움의 문제는 중요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미술작품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아름다움을 기대하는데도 말이다.

앤디 워홀 작 ‘마릴린 몬로’(1967). 같은 이미지의 다른 변주와 반복성이 모더니즘의 특성을 잘 드러낸다. 그는 손에 의한 조형성마저 거부하며 산업사회 이후의 미학을 대변한다.
1964년 뉴욕에서 앤디 워홀의 작품 ‘흰 브릴로 상자들’이 발표되었다. 외관상 이 작품은 슈퍼마켓의 브릴로 상자와 다를 바 없었다. 작품을 쌓아올려 전시한 모습도 마켓의 진열 방식과 똑같다. 목수를 시켜 만든 나무상자 표면에 색을 칠한 후 실크스크린으로 상품 로고를 찍어 만든 작품, 슈퍼마켓에 진열된 상품을 똑같이 복제해 만든 작품, 이것은 미술의 개념에 중대한 차이를 만들었다.

미술평론가이자 현대 미학자인 아서 단토는 이 장면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이로부터 나온 이론이 ‘예술의 종말’이다. 이는 모더니즘의 역사에서 예술가에게 부여되던 시대적 사명은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명령은 역사로부터 나오며’, 예술가는 ‘현재로서는 자신의 야망을 내던지고 케케묵은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는 다음에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족쇄’에 사로잡혀 있다고 주장했던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주장은 무력하게 되었다.

이제 예술가는 역사의 족쇄로부터 벗어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대를 맞았다. 그것이 아서 단토가 말하는 ‘예술의 종말’이다. 즉, 모더니즘이 관류하던 동안 예술가를 구속해오던 강령- 시대적으로 새롭고 순수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자신의 야망을 버리고 역사적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기조가 무너졌다는 것을 뜻한다. 동어반복적이고 자기증명적인 모더니즘의 ‘예술을 위한 예술’은 종말을 고했다. 이제 예술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되었다.

아마도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가장 극단적인 발언은 애드 라인하르트의 이 말이 아닌가 싶다.

“미술에 관해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것은 미술은 단 하나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추상미술의 50년 동안 단 하나의 목적은 미술을 그 밖의 어떤 것으로서가 아니라 미술로 제시하는 것이며, 그것을 더 공허하게, 더 절대적이면서도 더 배타적으로 만드는 것이다.”(1962)

‘더 공허하게, 더 절대적이면서도 더 배타적으로…’라는 말이 뇌리에 남는다.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 포스터. 귀를 자른 자화상을 묘사하는 장면, ‘때때로 그들은 내가 미쳤다고 말하지만, 광기는 최고의 예술이다’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아직도 예술은 극단적인 ‘예술을 위한 예술’과 예술의 종말 이후의 자유라는 맥락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 여지를 함유하고 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맥락이 무너지면서 ‘중심과 변방’의 체계도 무너져 오늘의 미술은 중심이 행사해오던 권위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원주의 문화로 불리는 다양성이 펼쳐져 있다. 오히려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문제는 변방에서 일어나고 있다지 않은가?

‘예술의 종말’을 말했던 아서 단토는 예술가를 지배하던 강령과 시대적 소명이 사라져 이제 예술가는 자유로워졌다고 했지만, 예술가에게 주어진 ‘자유’는 ‘그 자유를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다시 주어졌다. 노예 신분을 벗어나 자유인이 되면 모든 것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자유인은 두 발을 땅에 딛고 스스로 서서 세상을 바라보며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시민들이 민감한 현안 문제에 대하여 다양한 의사 표시를 하는 모습과 닮아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진정한 민주주의는 각기의 양식과 행동으로부터 나온다는 점, 집체적인 적대성을 키우는 광기가 아니라는 점을 의식해야 할 것 같다.

사실 고흐의 광기는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일 수 있지만, 고흐는 그 광기마저 예술의 중요한 힘으로 사용했다. 한 개인으로서 자유인이 되어 독립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자신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믿는 방향으로 실천해가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 포스터. 귀를 자른 자화상을 묘사하는 장면, ‘때때로 그들은 내가 미쳤다고 말하지만, 광기는 최고의 예술이다’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삶과 예술의 경계마저 모호해지는 시대이다. 그럴수록 진정한 예술과 사이비 사이의 구분은 더 민감해지고, 진정한 가치에 대한 열망은 더 치솟는다. 앤디 워홀이 슈퍼마켓의 상자와 똑같이 만들어서 쌓아두고 전시했던 ‘흰 브릴로 상자들’ 중 하나가 2010년 뉴욕 경매에서 300만 달러에 팔렸다는 기사는 미소를 띠게 한다. 목수를 시켜 마켓의 상품과 똑같이 만든 그 물건이 왜 그렇게 비싼 가격에 거래되었는가?

여기서 우리는 현대미술의 생리를 실감할 수 있다. 예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지만, 미술 시장은 작품의 역사성과 유명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술가는 자유를 버리고 시장 논리로 들어갈 수는 없다. 오히려 시장 논리를 벗어날수록 예술가의 자유가 돋보이는 점을 의식해야 할 것이다.

/장석원(미술평론가)
/장석원(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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