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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5·18민주화운동- (6)유가족 인터뷰

“문학소녀, 계엄군에 의해 사살당했다”
5·18 당시 시체수습위원회서 시신관리 봉사
자신의 꿈 은행원 취직하고도 출근조차 못해
“계엄군들 양심고백땐 따뜻하게 손잡아줄 것”
■ 주남마을 학살 피해자 박현숙양 언니 박현옥씨

2019년 05월 07일(화) 19:03
광주 동구 주남마을 학살 피해자 박현숙양의 언니 박현옥씨가 사진첩을 보며 동생의 옛 모습을 떠올리고 있다.
“공부도 잘했고 문학을 좋아했던 동생이었습니다. 1980년 7월 1일자로 은행에 출근이 결정됐었는데 자신이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어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 시체수습위원회에서 봉사를 하며 수많은 시민들의 시신을 관리했던 박현숙양(당시 만 18세)은 문학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소녀였다고 언니 박현옥씨(59·여·사진)는 기억하고 있다.

박현숙양은 신의여고(현 송원여상)에 다니고 있었고, 고향은 담양이라 1980년 당시 광주에서 함께 학교를 다니고 있던 남동생 1명, 여동생 1명과 함께 자취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비상계엄령이 확대되자 박양의 아버지가 담양에서 걸어서 힘겹게 자취하고 있는 자녀들을 데리러 광주로 왔지만 박현숙양이 집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제의를 뿌리치고 여동생만 담양으로 돌려보낸 박현숙양은 옛 전남도청에 머물면서 시체수습위원회에서 시체를 닦고 관에 모시는 일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민주화를 목청 높여 부르다 돌아가신 언니와 오빠들의 사체를 정리·관리하던 박현숙양은 1980년 5월 23일 관이 터무니없이 부족해 화순 인근에 관을 구하러 간다는 시민군과 함께 미니버스에 오르던 중 남동생을 내려주고 용돈을 손에 쥐어준 채 화순으로 떠났다.

하지만 이 모습이 남동생이 누나를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박현숙양을 태운 소형버스가 화순을 넘어가던 중 1980년 5월 23일 광주 동구 월남동 주남마을 앞길을 달리던 때 그곳에 매복해있던 계엄군에 의해 집중사격을 받고 온몸에 총탄자국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박현숙양은 자신의 꿈을 꽃피우지도 못한 채 그렇게 5·18국립묘지 2-03에 묻혔다.

언니 박현옥씨는 “당시 실종됐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리 수소문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며 “나중에 여러 언론사에서 시체의 가족을 찾는다는 사실을 알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청 등지에 갔을 때는 이미 사체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패됐었다. 당시 총탄과 대검으로 수차례 찌른 자상만이 현숙이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고 말했다.

박씨는 또 당시를 기억하며 “당시 현숙이가 감수성이 뛰어났고, 의협심이 남달랐다. 주변에서 죽어가는 친구들, 언니와 오빠들을 보면서 광주에 머물러 있기로 결심한 것 같다”면서 “만약 당시 아버지 말씀대로 담양에 왔었다면 두 달 뒤 은행원으로서 자신이 원하는 꿈도 마음껏 피울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편, 박씨는 최근 자유한국당의 ‘유족괴물 발언’에 대해 “죽은 사람이 버젓이 있고 이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유족들에게 괴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유족의 억울함만 더 키우는 일”이라며 “지금이라도 당시 총책임자였던 전두환씨는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하며,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들이 양심고백을 한다면 우리 유족들은 언제라도 그들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줄 용의가 있다”고 덧붙였다.

/김종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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