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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투쟁’ 광주 학생독립운동가 고인석 선생

독립정신 고취…일제 만행 ‘항거’
광주고보 재학 중 ‘동맹휴학’ 주동 퇴학 처분
항일비밀결사체 ‘광주학생독서회’ 가입 활동
올해 8월 독립운동 공적 인정 대통령표창 받아

2018년 11월 01일(목) 18:43
광주 학생독립운동가 고인석 선생
[ 전남매일=광주] 고광민 기자 = 일제 식민지 정책에 학생들이 항거한 날을 기념해 제정된 ‘학생독립운동기념일’(11월 3일)은 3·1운동, 6·10만세운동 등과 함께 일제 강점기 3대 항일운동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고 고인석 선생(1909∼1997)은 이런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 독립운동 공적을 뒤늦게 인정받은 인물이다. 고 선생은 올해 제73주년 8·15광복절을 기념해 김한필(1914∼1949)·박동준(1914∼1970)·이호상(1890∼1975)·민영진(1869∼1947) 선생 등과 함께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에 따른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고 선생은 1928년 6월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고보) 4학년 재학 중 항일운동을 한 5학년 동기 이경채 퇴학을 계기로 5개월 동안 식민지 교육에 항거하는 ‘동맹휴학’에 참여했다가 퇴학처분을 당한 것이 공식 기록으로 확인됐다.

당시 학생들은 일제의 만행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직·간접적으로 항일투쟁에 나서는 분위기였다. 광주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이 발생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항일운동 분위기는 고스란히 학내로 이어지고 동맹휴학 1주년이 되는 6월 26일엔 5학년을 비롯해 2~3학년 학생들이 수업거부와 하학하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또 이날 통학열차에선 광주 운암역을 통과할 때 일본인 중학생이 ‘한국인은 야만스럽다’는 말을 하면서 한·일 학생들의 충돌까지 빚어진다.

급기야 1929년 10월 30일 광주발 통학열차가 나주에 도착했을 때 일본학생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면서 광주고보 학생들과 시비가 붙어 항일시위가 촉발하게 된다.

이후 동맹휴학은 전국으로 확산되고, 일제는 참가학생 5만4,000여명 중 1,462명을 구속, 2,912명을 퇴학·무기정학 처분하는 등 강경 탄압으로 대응했다.

고 선생은 당시 약소민족해방운동을 목적으로 항일 비밀결사인 ‘광주 학생독서회’에 가입, 삐라 배포 등 민족독립정신 고취와 동지규합에 역량을 쏟았다.

동맹휴학 형태로 가열된 광주 학생의 대일항쟁은 날이 갈수록 단계적 발전을 거듭하고, 광주고보를 비롯한 여러 학교의 동맹휴학은 민족독립항쟁 도화선이 되면서 결국 전국적인 항일민족운동으로 번지는 계기가 된다.

고 선생은 동맹휴학 주동자로 지목돼 일제의 예비검속을 피해 서울로 도피, 경신고보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유학 중에도 항일 지하운동을 하던 그는 중국 상해로 떠났다는 게 현재 전해지고 있는 기록들이다.

해방 전 귀국한 고 선생은 1945~1948년 미 군정시절 ‘귀속재산 일본청산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휴전 후 1954년 고향인 담양 창평에 낙향해 창평고등공민학교를 설립, 20년간 문맹퇴치운동과 국가재건을 위해 후학양성에 매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고 선생의 이같은 공적은 사후 20여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된다. 고 선생은 생존 당시 군사독재정부에서 독립유공자라는 서훈을 받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나라의 독립과 안위를 걱정하며 목숨을 걸고 항일투쟁에 나섰던 지난 세월들이 군사독재정권에선 그 가치가 퇴색된다는 고집스런 이유에서다.

고 선생의 이런 바람은 뒤늦게 이뤄진다. 고 선생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기 전 1997년 가을께 세상을 등진다. 그리고 사후에도 독립유공자 인정까지 기나긴 세월을 감내해야 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와 보훈처는 결정문을 통해 ‘고인석 선생의 항일독립운동 공적 사실은 뚜렷하나, 도일 이후 행적이 불문명하다’는 이유를 들어 독립유공자 심사에서 각하결정을 내린 것이다.

보훈처의 각하결정에 아들 고욱씨(61)의 길고 외로운 싸움은 20여년 동안 이어지면서 국가기록원과 일본대사관·영국대사관·중국 상해·하와이 등 세계 각국을 전전하며 아버지에 대한 여러 기록을 찾게 된다.

고씨의 이런 노력으로 21년 만인 올해 8월 고 선생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게 된다.

고씨는 독립유공자 선정과정에서 정부측에 서운한 감정을 토로한다.

그는 “보훈처는 한결같이 수형사실에만 기준을 두고, 독립유공자 선정여부를 심사했다”며 “독립운동에 대한 가치판단이 왜 수형사실 하나에만 국한돼야 하는지 알 수 없고, 이런 후진국형 보훈정책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독립유공 후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그는 “뒤늦게나마 선친의 학생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기쁘다”며 “정부 차원의 선양사업이 꾸준히 지속돼 나라를 위해 희생된 독립유공자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고씨는 또 “선친이 1938~1943년까지 5년간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의 행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며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이 기간의 족적을 반드시 되짚어볼 계획이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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